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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명 이영주 Oct 18. 2019

우물가 사람들

집집마다 우물이 있었다. 물론 없는 집도 있었겠지만 우리 집 주변 집들은 크든 작든 깊든 얕든 간에 우물이 있었다. 우리 집과 담을 나누는 소씨집 마당은 흙마당이었다. 담벼락 쪽에는 한 자쯤 높여 돋운 장독대가 있고 그 장독대에 붙여 우물이 있었다. 나중에 수도가 들어온 뒤에는 수돗물을 받아두는 네모난 수조를 만들었다. 수조 안벽에는 우렁이나 고동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 집 우물은 지붕도 덮개도 없는 개방형이었다. 두레박이 달려 있었는데 나중에 수동식 펌프를 달았다.

우리 집과 방문을 통해 연결된 박교수 댁 우물은 지붕이 있는 형태였고 두레박이 지붕 아래를 가로지르는 통나무에 달려 있었다. 지붕이라고는 해도 비가림을 겨우 할만한 양철 지붕이었다.

우리 집 뒤안을 사이에 둔 뒷집은 마당을 거의 시멘트로 발랐는데 그 한가운데 우물이 있었다. 우물가는 설거지며 빨래터를 겸한 곳이었고 우물에 덮개는 없었다. 두레박을 썼다.

우리 집 옆 골목 두 번째 집인 정씨 자매 집 우물은 흙마당 한편에 있었고 덮개도 없이 그저 흙마당에 돌을 쌓아 올린 것이었고 두레박을 썼다. 우물 곁에 커다란 감나무가 자랐다.

우리 집을 지으며 우물을 팠다. 우물에서는 처음에 뻘건 황톳물이 나왔는데 깊이 파들어 가자 이윽고 맑은 물이 솟았다. 아버지는 두레박 대신 우물에 손으로 퍼올리는 수동식 펌프를 달았다. 나중에 아예 우물을 덮어버리고 전동식 펌프를 붙여 수도꼭지를 달았다.

두레박을 쓰는 우물에서는 두레박을 던져 넣을 때 주의해야 했다. 물론 대부분 두레박을 매단 줄은 충분히 길었지만 간혹 부주의하면 두레박줄이 우물에 딸려 들어가기도 했다. 박교수 댁 같은 경우에는 가로 막대에 도르래를 달아 내린 경우라서 줄이 딸려 들어갈 일은 없었다. 소씨집이나 정씨 자매 집 같은 경우에는 우물이 얕기도 했거니와 달리 줄을 매달지 않았으므로 어쩌다가 두레박이 줄째로 우물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길다란 대나무 막대 끝에 갈고리를 달아서 두레박을 건져낸 정도쯤은 어느 집이나 예사로 했다.

우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물이 하늘처럼 붕 떠오르고  내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비 오는 날 우물을 들여다보면 신기했다. 빗방울이 만드는 동심원들 때문에 물 위에 비친 얼굴이며 하늘이 일렁였고 현깃증이 났다. 웬만큼 가물어도 우물물이 크게 줄어드는 법은 거의 없었다. 어느 핸가 나는 우물에 들어간 일이 있었다. 무슨 일로 그리 되었는지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집 우물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우물은 제법 통이 컸고 돌들을 돌려 쌓았는데 느낌이 좋았다. 우물물은 꽤나 줄어들어 있었고 우물 벽에는 퍼런 이끼들이 돌 틈마다 자라 있었다.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올라왔던 것 같은데 그것이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꿈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우물은 그림자에 가려 있어서 우물 바닥이 시커멓게 보였다. 그런 우물은 두려웠다. 고개를 내밀면 집어삼켜질 듯한 느낌이었다. 마당 한가운데 있고 지붕이 없는 우물들은 대개 우물 바닥이 들여다 보였다. 우물 바닥은 모래 같은 것들이 깔려 있고 투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깊은 우물은 물맛이 시원하고 좋았다. 그만큼 두레박을 오래 내려야만 했다. 두레박을 던져 넣으면 첨벙 하고 우물물에 두레박이 닿는 소리가 들린다. 두레박줄을 당겼다 놓으면서 두레박이 물속에 잠기게 한 뒤 묵직해진 두레박을 끌어올리면 되는데 이것이 간단해 보여도 요령이 필요한 일이었다. 두레박이 수면에 떨어진 뒤 두레박줄을 느슨하게 늘어뜨린 뒤 좌우로 살살 흔들면 두레박이 흔들리며 물에 잠긴다. 그러면 줄을 팽팽히 당기면 된다. 그때는 최대한 우물 안쪽으로 상반신을 내밀어 똑바로 길어 올려야 한다. 안 그러면 우물 벽에 두레박이 부딪혀 안에 담긴 물을 흘리게 된다. 한두 번이야 그렇다 쳐도 양동이에 한 가득 물을 길어 올리려면 적어도 네댓 번은 두레박질을 해야 했다. 어머니나 손윗 누이들은 두레박질이 능숙했다.

수동식 펌프는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아침에 세숫물을 퍼올리려면 마중물 한 두 바가지가 필요했다. 수조나 항아리에 미리 길어둔 물을 떠서 고려청자처럼 혹은 콜라병처럼 생긴 펌프에 쏟아붓고는 손잡이를 끼익끼익 움직여 준다. 마중물이 제대로 진공상태를 만들어 줄 때까지는 펌프질이 헛돌았다. 마중물이 제대로 펌프관에 채워져 진공이 되면 그다음에는 펌프에 무게가 실리며 물이 올라온다. 처음에 올라오는 물은 대개 시뻘건 녹물이다. 펌프 주둥이에서 녹물이 얼마쯤 나온 후에 물이 맑아지면 양동이에 물을 채운다. 여름이라면 미지근한 물이 올라오다가 차가운 물이 올라올 때까지 올라온 물은 흘려버리고 시원한 물만 받아 썼다. 겨울에는 펌프가 얼어붙는 날이 있다. 그때는 뜨거운 물을 양동이에 길어 와서 펌프에 마중물로 넣어 관속에 얼은 물을 녹인 뒤에야 물을 길어 올릴 수 있었다. 겨울에 길어 올린 우물물에선 하얀 김이 솟았다. 펌프질 하는 소리는 이집저집 할 것 없이 예사로 들렸다.


(출처: http://blog.daum.net/soldungji/8878055)

소씨집 큰형이 어느 여름날 애인의 등에 칼을 꽂은 것을 본 뒤로는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그래도 홀로 된 그 집 아주머니가 우물에 두레박을 던져 넣으면 우물물에 두레박이 첨벙 떨어지는 소리를 나는 담너머 이쪽 우리 집까지 예사로 들렀다. 우물가에서 그 집 작은 형이 어머니나 누이가 길어 올린 물로 시원하게 등목 하는 소리도 예사로 들었다. 박교수댁이나 뒷집이나 정씨 자매 집은 내 방에서 멀어서 그런 소리를 들어보지는 못했다. 기열이 집에도 우물이 있었고, 꽤 떨어진 봉권이 집에도 우물이 있었고, 개천 너머에 있던 응종이네 집에도 우물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동네에 수도가 들어오자 우물들은 대부분 매워지거나 뚜껑이 덮이고 말았다. 우리 집 우물은 수도가 들어온 뒤에도 한일자동펌프를 한동안 붙여 뒀는데 물 사정이 나아지자 펌프를 떼어낸 뒤 우물물을 더 이상 퍼올리지 않았다. 수동식 펌프들은 녹이 슨 채로 자리를 지키다가 어느 틈엔가 사라졌다. 우물물을 길어 먹던 사람들도 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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