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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명 이영주 Jan 12. 2019

그에게 바랬던 평안: 이니스프리

우물지기의 따뜻한 수프

내가 그때 그에게 소망한 것은, 그러니까 꽤 오래전부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늘 원하고 전하고 싶었던 것은, 평안이었다.


방법도 수단도 딱히 없었지만 평안이든 평강이든 위로이든 이름이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그것을 전하고 싶었다. 우습게도 그렇게 염원하는 나 자신의 내면에 넘치는 평안이나 평강은 없거나 미약했다. 어쩌면 그런 결핍이 오히려 간절함을 증폭시켰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중학교 시절 나는 꽤나 이니스프리에 대한 인상을 평화로운 것으로 가지고 있었다. 예이츠는 이니스프리의 섬들에 대해 낭만적으로 묘사했다.


“(전략)


벌 윙윙대는 숲 속에 나 혼자 살리


거기서 얼마쯤 平和(평화)를 맛보리

평화는 천천히 내리는 것


(중략)


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들리네”


예이츠는 그저 평온함을 염원해서 이 시를 썼을까? 오히려 그의 처한 상황이나 여건은 평화와는 동떨어진 어떤 불안과 고통 속에 휩싸여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배경이야 어찌 되었든 그는 평화에 대한, 평온에 대한 염원을 아름답게 노래했고 그 인상은 내게 오랫동안 그렇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른바 안빈낙도의 삶을 예찬하였다고 그렇게 배웠다. 맞을 것이다.




그와 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나는 그가 어떤 이유에 선지 모르지만 어떤 불안함이나 평온과는 반대되는 정서로 괴로워하고 있다고 느꼈다. 물론 그것은 오로지 내 혼자만의 느낌이므로 확인할 방도는 없었다. 이른바 좋은 이야기로 이어지다가도 심하게 흔들리는 어떤 괴로움의 파장이 전해져 올 때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어리둥절했고, 그 모든 불안이랄까, 분노랄까, 그런 것들이 모조리 나를 향해 불화살처럼 날아온다고 느꼈다.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다. 물론 그것은 역부족. 나처럼 나약한 인간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무엇엔가 닿은 달팽이의 눈처럼 쏙 들어가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실제로 침묵함으로써 여러 번 숨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때마다 그의 비난이랄까 분노랄까 그런 것들이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의 포말처럼 철썩철썩 올라왔고, 그것을 읽는 나는 숨이 막혔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되면 다시 대화는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대화는 새로운 챕터로 발전, 내지는 진전되어갔다. 그것은 성장이라면 성장이고, 성과라면 성과였다.


그는 과연 조금씩이나마 내적 평안 내지는 평화를 얻은 것일까? 혹은 다른 형태로 어떤 균형 같은 것을 찾은 것일까? 지방 가는 고속도로에서 나는 차창 밖으로 가까이 왔다가 뒤로 멀리 밀려나는 가드레일들 그리고 그 너머로 나를 응시하며 따라오는 교각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우리가 가는 도시의 이름은 큰 평안, 큰 평화라는 뜻이라는데 왜 내 마음은 이렇게 가라앉는 것일까 궁금했다. 답도 없는 궁금함과 답답함에도 불구하고 한 편으로는 사실 얼마쯤 불분명한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싶은 그런 생각도 들었다.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이라고 했던가? 피식 웃음이 나는 말이지만 어쩌면 그 말이 인생에서 참으로 맞는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확실히 뭔가가 정리, 내지는 정돈되는 느낌이 없이 그렇게 돌아온 뒤, 참 많은 일들이 생겼다. 원고는 권 수가 늘어났고, 그 안에 담긴 것들은 까만 잉크의 글자에서 그림으로, 채색으로, 그렇게 누가 요구한 것도, 종용한 것도, 의도한 것도 아닌데 거의 스스로 채워져 갔다. 침묵이 능사가 아니고 오히려 화약고가 된다는 깨달음에 이어 깨달음만으로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는 두 번째 깨달음을 통해 나는 변화하기로 했고, 다행히 일단은 변화가 변화로 이어졌다.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옷장이 있는 방 벽에는 한 폭의 풍경화가 걸려 있다. 크지 않은 그림이다. 넘실대는 큰 파도 가운데 작은 배, 배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작은 보트 한 대가 노여울 대로 노여운 파도 위에 떠 있다. 그 보트 안에는 어떤 사람이 하나 앉았는데, 그는 오히려 뱃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말이다. 누구의 말마따나 내 기억력은 꽤나 리버럴 해서 내 맘대로이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평온해 보일 수 있었을까?


여수 오동도 항에서 고깃배를 세내어 타고 安島(안도)라는 섬으로 갈 때 나는 큰 파도가 얼마나 무서운지 체험했다. 몇 톤이나 되는 꽤 큰 배가 큰 너울 위에 놓이자 정말 밀 까부르듯이 하늘로 붕 떠올랐다가 다시 너울이 내려가자 한없이 아래로 내려가는데 사방은 산만큼이나 커다란 너울로 둘러싸여서 만약 저 너울이 우리를 덮치기라고 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고기 밥이 될 것 같은 경험이었다. 선장은 모두 선실로 들어와서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저 배가 너울 위에 올라타 있는 것만으로 오히려 안전하다고 그는 말했다. 괜히 방향타를 돌려서 너울을 거스르려고 하면 도리어 배가 균형을 잃고 난파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배 위쪽에서 노란 번개가 바다 위, 그러니까 노한 물결 위, 하얀 거품이 부글거리는 그 위로 번쩍 하며 물속으로 제우스의 화살인지 창처럼 내리꽂는 장면은 평생을 두고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한 시간쯤을 버티자 조금 폭풍우가 잠잠해져서 우리 일행은 安島(안도)에 내려 살아 돌아왔다.




나는 그가 어떤 경우에든 평안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가 오히려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고, 그의 에너지를 모아 내 깊은 슬픔이랄까 무력감의 늪에서 나를 끌어내느라 기진하고 있음을 나는 잘 알지 못했다. 그가 그렇게 피를 토하며 말하기 전까지는 사실 무진의 안개처럼 막연하게 느꼈을 뿐 확실히 체감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것들을 제대로 보게 되었을 때 한 없이 미안했다. 미안하다고 했더니 그는 늘 그렇듯 또 미안하다고 하고 말 거냐며 으르렁거렸다. 나는 정육점에 매달린 고깃덩어리 같은, 생선가게의 얼음 침대에 누운 생선처럼, 예리한 칼로 저며져도 좋으리라는 각오로 엎드렸다. 그리고 오래 닫혀있던 원고는 겨우 페이지를 채우고 마무리되었다.




예이츠는 이니스프리로 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가 정말 그 섬들로 가고 싶었는지, 아니면 그곳에 가는 상상만으로도 평화를 누렸는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유년의 기억에서부터 나는 이미 그곳에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든다. 마음속에 잔잔히, 도도리 흐르는, 큰 흐름.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잔잔함. 철썩 이는 바닷가 절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은 평안. 내가 줄 수는 없는 것이지만 나는 그가 이 평안을 한없이 누렸으면 좋겠다, 참 좋겠다고, 그렇게 늘 생각했다. 바랬다. 그런데 때때로 나는 잔잔한 평안보다는 불안이나 또는 동요나 혹은 파문 같은 것을 주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얼마나 많은 상처, 혹은 불안, 또는 혼돈 같은 것을 주지는 않았을까, 그것이 항상 두려웠다.


그러나 나는 안다. 알게 되었다. 그는 나보다 강하다. 요동하지 않는 심성을 가졌다. 사람을 사랑하고,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그는. 그는 도전하고, 성취하며 개척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직 젊다. 젊음의 힘이 넘친다. 스스로를 부끄럼을 많이 타고, 그래서 늘 앞에 나서기가 두렵다고 하지만, 그 점이 그의 장점이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그 점. 나는 소망한다. 그가 잘 되기를.




<이니스프리의 호도(湖島)>


W. B. Yeats, 1865 - 1939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욋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을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

벌 윙윙대는 숲 속에 나 혼자 살리.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맛보리.

평화는 천천히 내리는 것.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라미 우는 곳에 이르기까지.

한밤엔 온통 반짝이는 빛

한낮엔 보라빛 환한 기색


저녁엔 홍방울새의 날개 소리 가득한 그 곳.


나 일어나 이제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물결 소리 들리나니

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 위에 서 있을 때면

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사진출처: www.architecturaldige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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