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셀런스 클라스에서의 8시간
어느 여행지든 ‘이건 꼭 해봐야 한다’는 것이 있다. 파리에서 에펠탑에 오르지 않거나, 나폴리에서 피자를 맛보지 않고 돌아오는 것은 뭔가 빠뜨린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막상 현지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데, 여행자에게는 특별한 경험이 되는 것들도 있다. 한국에 오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복을 빌려입고 고궁 체험을 하는것 처럼 말이다.
스위스에서 그런 존재가 바로 빙하 특급열차(Glacier Express) 가 아닐까 싶다. 누구나 좋은 경험이라는 건 알지만, 스위스 사람들 입장에서는 “굳이 비싼 돈 주고 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워낙 어디서든 기차만 타도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특별히 기차 여행을 계획해본 적은 없었는데, 문득 한 번 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실행에 옮기게 됐다.
스위스에서 유명한 관광 열차 노선은 세 가지가 있다.
• Glacier Express (St. Moritz – Zermatt)
• GoldenPass (Montreux – Interlaken)
• Bernina Express (St. Moritz – Tirano)
우리는 세인모리츠에서 체르마트로 이어지는 빙하 특급열차를 택했다. 세인모리츠 지역은 아직 가본 적이 없었고, 마침 체르마트로 스키를 타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골든패스 루트는 살면서 여러 번 타본 길이라 새로움이 없었고, 베르니나 열차는 일부 구간이 빙하 특급과 겹쳐 이번엔 패스했다.
빙하 특급열차는 1등석, 2등석 외에도 2019년에 새로 생긴 엑셀런스 클래스(Excellence Class) 가 있다. 보통 1등석은 음식을 따로 주문해야 하지만, 엑셀런스 클래스에서는 5코스 메뉴와 와인 페어링이 포함된다. 좌석은 한정적이고, 기차칸 안에는 전용 바까지 마련되어 있다. 우리는 ‘한 번 탈 거라면 제대로 경험해보자’는 마음으로 엑셀런스 클래스를예약했다.
마치 처음 스위스를 여행하는 사람처럼 들떠서, 우리는 출발지인 세인모리츠에 도착했다. (세인모리츠에 대한 이야기는 앞선 글 참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 8시 30분 출발 시간에 맞춰 역으로 향했다. 엑셀런스 클래스 칸은 기차의 맨 앞에 자리 잡고 있었고, 컨시어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기차에 오를 때는 레드카펫까지 깔려 있었다.
승무원의 환영을 받으며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기차에 올랐다. 스위스풍으로 꾸며진 아늑한 객실, 편안한 좌석, 좌석마다 비치된 아이패드, 그리고 웰컴 샴페인까지. 그렇게 8시간의 기차 여행이 시작됐다.
우리가 기차에 오른 시기는 4월 둘째 주. 눈이 빠르게 녹아가던 때라 ‘빙하 특급’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설경을 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이미 이 노선을 겨울에 탄 친구는 “눈 덮인 풍경만 8시간 내내 이어져 단조로웠다”고 했는데, 혹시 반대로 초록빛 풍경만 보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언젠가는 지구온난화로 이마저도 보기 힘들어질 거라는 생각이 스치며 더욱 아쉬움이 남았다.
출발 후 첫 두 시간은 전날 세인모리츠에서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가는 코스였다. 듬성듬성 남아 있던 눈 사이로 푸른 초원이 드러나고, 얼어붙었던 계곡물이 녹아 세차게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높은 산 사이를 기차가 천천히 지나며, 우리는 샴페인과 아뮤즈부슈를 즐겼다. 이어서 본격적인 5코스가 시작됐다. 매 코스마다 와인이 페어링되어 나왔고, 기차 안에서 준비된 음식치고는 기대 이상이었다. 따뜻한 스프부터 생선요리, 스테이크, 치즈플래터, 디저트 까지 양도 적당했고 재료도 신선했으며 와인페어링도 그럴싸했다. 느긋하게 코스를 즐기며 창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여행의 리듬이 여유로웠다. 아이패드에는 현재 기차의 위치와 각 구간에 대한 설명이 표시되어 여행의 재미를 더해주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구간은 단연 우르센 계곡(Ursern Valley) 을 지나 안데르마트 (Andermatt) 로 향하는 길이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초록빛이던 풍경이 순식간에 설원으로 바뀌었고, 멀리 산 위에는 스키어들의 모습도 보였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넋을 잃고 창밖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기차는 해발 2,033m의 오베알프 고개 (Oberwald)에 다다르고 있었다. 빙하 특급의 하이라이트라 불릴 만한 장면이었다. 여전히 그 순간을 떠올리면 자연이 주는 압도적인 힘이 느껴진다.
이 구간을 지나면서부터 기차는 서서히 체르마트로 향했다. 8시간이 긴 줄 알았는데, 풍경과 음식, 바에서의 대화와 여유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오히려 체르마트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이 더 빨리 가버리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았다.
엑셀런스 클래스의 또 다른 즐거움은 전용 바였다. 커피와 차, 음료를 마음껏 즐길 수 있고, 서서 풍경을 감상하거나 승무원 또는 다른 승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여행의 또 다른 재미였다. 한곳에 긴 시간을 같이 여행하다보니 눈도 마주치고 복도에서 마주치기도 하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게됬다. 미국에서 온 승객들이 많았고 그 다음은 태국과 중국, 영국, 독일, 그리고 스위스에서 온 우리가 있었다. 우리가 제일 젊은 나이대인듯 했고 대부분 50대에서 8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었다.
여행의 마지막에는 이름이 적힌 증서와 글래시어 익스프레스 문양이 새겨진 술잔을 선물로 받았다. 작은 기념품이었지만, 특별한 여정의 마침표처럼 느껴졌다. 다시 타고 싶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다만 엑셀런스 클래스는 한 번의 경험으로 충분하다. 다음에는 퍼스트 클래스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기차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