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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블제이 Jul 26. 2021

풀잎보기


이곳에서는 비가 온 다음 날 산책을 하다 보면 차에 깔려 죽은 뱀과 개구리를 5분 간격으로 볼 수 있다. 풀숲 근처로 강아지와 산책을 갈 때면 꿩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날아오르고, 오름을 걷다 보면 커다란 뿔을 가진 노루를 만나기도 한다. 어떤 날 아침에는 기분이 좋은 한라산이 구름을 잔뜩 두른 채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또 어떤 날은 저녁을 사먹고 바닷가를 걷다가 보면 백사장이며 바다며 남편의 이마까지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석양을 보기도 한다. 우리는 2월 20일 제주로 이사 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는 차로 10분을 나가야 편의점에 갈 수 있다. 걸어서는 30분이 조금 넘게 걸린다. 길거리는 녹음으로 가득하다.


길가의 풀은 약 한 달을 주기로 완전히 바뀌어버린다. 처음 제주에 도착한 2월, 노랗게 죽어있던 길가의 풀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푸르게 변했다. 3월 말쯤 “고사리 비”가 오면 길가 여기저기에 여린 고사리가 자라나고 동네 할매들의 손도 바빠진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꽃들이 피기 시작한다. 어떤 때는 흰 꽃과 노란 꽃이 피고, 분홍 꽃이 폈다가 보라색 꽃이 피기도 한다. 한차례 비가 오고 나면 달큰한 풀 냄새가 길을 가득 메운다. 5월이 지나 6월에 다가오면 밭에 청보리가 가득하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보리는 함께 누웠다 함께 일어선다. 한차례 장마가 지나간 지금은 모든 풀이 경쟁하듯 커간다. 그 사이에 동네 텃밭의 호박이 익어가고, 옥수수도 야무지게 영글어간다. 아무리 보잘것없이 보이는 풀이라도 때가 다가오면 꽃을 피운다. 꽃은 때때로 밥풀같이, 조팝같이 작다. 그러나 나비는 꽃을 차별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에 그렇게 많은 나비를 처음 보았다. 3월부터는 우리가 “바닐라맛”이라고 부르는 흰색 나비와 “레몬맛” 노란 나비가 주를 이루다가, 7월에 들어서자 검정색 바탕에 형광색에 가까운 파란색이 피어있는 커다란 제비나비가 날아든다.


나는 이곳에서 근대 이전의 삶을 생각한다. 모 할당된 자연이 더 컸던 때, 하늘에 피어오르는 구름과 석양과 곡식을 키우는 해를 보며 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사람들을 떠올린다. 코로나와 기후변화를 겪으며 우리가 이러한 변화를 겪게 된 기저에는 인간이 인간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적 압박, 끊임없이 집요하게 인간을 사랑하는 것만이 아름답다는 예술적 강박이 있을 지 모른다. 전근대 사람들이 유기체로서의 자연과 보다 깊은 관계를 누렸을 것이다. 나비, 빗방울, 꽃, 풀 냄새, 노루와 꿩을 몰아내고 결국 영혼도 사라진 텅 빈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근대적 질병이 아닐까? 코로나 시대에 들어선 후 집안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사람들이 사물이나 동식물과 같이 작은 것에 지나치게 이입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위험하다는 신호라는 글귀를 읽었다. 우리가 나누던 공허한 사랑이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동식물과 작은 사물이 가진 아름다움에 고개를 돌린 사람에게 ‘정신이 건강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다. 경계 없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 그런 누추한 담론에 기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위축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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