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됐으니까 보양식과 제철 과일을 먹어야지, 가을에는 이 산 저 산으로 단풍놀이를 가야지, 겨울에는 추위를 마주하야 월동 준비를 해야지, 봄에는 꽃이 흐드러지게 핀 곳으로 나들이 가야지, 하는 생각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계절에 점점 더 민감해진다. 철에 맞는 음식을 먹고 마시고 해야 안 아프다. 꼭 그때가 아니면 못하는 것들을 누려야지 만족스럽다. 날씨와 계절의 변화를 사무실의 시계와 달력과 휴대폰 아이콘을 보는 대신 코로 대기의 냄새를 맡거나 팔뚝에 돋은 소름이나 콧잔등을 타고 흐르는 땀 같은 것들로 감각한다. 그럴 때마다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연에서 난 게 맞는구나, 싶다. 태어날 때부터 문명에 젖어 자연이라는 고향을 잊고 살았지만 내 몸은 아직도 오래된 기억을 잃지 않은 것.
그래서 올여름에도 이 계절에 가장 맛난 것들을 열심히 먹고 마시는 중이다. 수박과 복숭아와 자두와 옥수수 같은 과일도, 단골 카페의 자두 주스와 여름 한정 팥빙수도, 유명한 집의 콩국수와 막국수와 슴슴한 냉면도 다, 모두 다. 마침내인공적인 단맛의 세계에 눈 떠버린 다섯 살 아이 때문에 아이스크림도 자주 먹는다. 아이가 요즘 특히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은 포도맛 폴라포다. 어린이집에서 하원하고 놀이터에서 한바탕 뛰어노느라 땀범벅이 됐을 때 먹는 차가운 폴라포는 얼마나 꿀맛인지. 먹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만 봐도 시원해진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글이다. 단단하게 얼은 폴라포를 빨아먹다 보면 점점 녹는다. 마지막에는 아래 부분에 보랏빛 진한 엑기스가 남는다. 달디달고 달디 단 포도 주스 맛이 나는 녹은 물이야말로 바로 폴라포의 정수라고. 아무도 몰래 나 혼자만 먹고 싶은 맛이라고. 이걸 다른 이에게 양보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거라고 했다. 아이가 열심히 폴라포를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 글이 생각났다. 거의 다 먹을 때 즈음에 이르자 아이에게 말했다.
"진아, 아빠 한 입만 줘. 그거, 지금 후루룩 마시는 거, 아빠도 좀 먹자."
아이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싫어,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행여나 뺏길세라 양손으로 폴라포를 꽉 움켜쥐면서. 어깨도 비스듬히 돌려 나를 등지고 서려 한다. 분명 폴라포를 빨아먹을 땐 입가에 웃음이 가득했는데.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가 말했다.
"그럼 엄마는 줄 거야?"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환한 표정으로웃었다. 폴라포를 붙잡은 조그마한 손을 엄마에게 내밀었다.
어떻게 아빠한테 이럴 수가 있지. 너는 엄마만 찐사랑이고 아빠는 그냥 사랑, 인지 아닌지 모를, 여하튼 뭔가에 불과한 거구나. 아이는 아빠 메롱, 하면서 나에게는 폴라포를 한 입도 주지 않았다. 상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빠는 왜 안 줘? 아빠는 안 사랑해? 엄마만 좋아하는 거야?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말해 봐. 아이에게 계속해서 물었다.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루종일 구시렁거리자 아내가 나더러 왜 이렇게 사람이 좀스럽냐고 놀렸다. 더 쫌생이처럼 보이려고 이렇게 일기로도 남긴다.
2024년 7월 24일. 아이는 나한테 폴라포 엑기스를 한 입도 안 줬다. 그런데 엄마한테는 줬다. 엄마한테만 찐사랑인가 보다. 못 얻어먹은 나는 무척 마음이 상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