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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Nov 14. 2024

나의 취향을 드러내는 것

어쩌면 손가락질받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

 진지하게 음악을 들어본 지 오래됐다. 한창 라디오 PD 시험을 준비하던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거의 10년이 넘도록 그랬다. 이제는 새로운 음악을 듣기보단 이미 알던 음악을 듣고, 애써 찾아 듣기보단 누군가 추천해 준 음악을 듣고, 생각 없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중 '어라, 이거 좀 괜찮은데?' 하는 생각이 드는 곡들 몇 개를 찾아 듣다가 금세 그치곤 한다. 사람은 서른이 넘으면 머리도 취향도 사상도 굳어져서 바뀌지 않는다더라. 더 이상 '새로운' 음악도 듣지 않는다더니 얼추 맞는 말이구나 싶다.


 그래서 매번 듣는 건 이승환, 윤상, 신해철 등의 예전 음악들이나 90년대 댄스 가요들이었다. 출퇴근길에 매번 듣다가 어느날엔 지겨워져서 오랜만에 거실 CD장을 뒤져봤다. 그동안 격조했던 앨범들 중 눈에 띄는 녀석들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 소리바다에서 다운로드한 mp3 파일로 손수 '구운' 음악 CD들. 누가 그때 그 시절 남고생이 아니랄까 봐 부활의 '사랑할수록', 김종서의 '겨울비', K2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엠씨더맥스의 '잠시만 안녕' 같은 가수들의 노래로 가득 찬 <나만의 락발라드 베스트> 따위가 뿌연 먼지를 머금고 장 한 구석에 놓여 있었다.


 이런 노래들은 매주 금요일 저녁에도 듣곤 한다. 아내와 함께 꼭 챙겨보는 TV 프로그램 때문이다. KBS Joy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하는 <20세기 힛-트송>이라는 프로그램. 가수이자 방송인 슈퍼주니어 김희철과 舊러블리즈 이미주, 그리고 스포츠 아나운서 이동근이 진행하는 소위 '옛날 가요' 차트쇼다. 8090 가요들, 말 그대로 20세기에 히트한 노래들을 소재로 했기에 보고 있으면 마치 예전 그때로 돌아간 듯해서 추억 속에 빠지게 된다. 이문세, 변진섭, 신승훈, 김건모, 클론, 김현정... 어릴 적 <가요톱텐>을 보며 좋아했던 가수들이 화면에 나오면 나도 아내도 마치 십 대 소년소녀가 된 기분이 든다.


 방송은 매주 주제를 정해서 10위부터 1위까지 순위를 매긴다. 이를테면 고음불가 노래 탑 10, 원조 걸크러시 히트송 탑 10, 레전드 록 보컬 탑 10, 얼굴 없는 가수 탑 10 등이다. 몇 년 전에 유튜브에서 유행했던 ‘탑골 가요’ 흐름에 편승해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라 여겨서 이게 몇 회나 가겠어, 그 시절 히트곡이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니고 조만간 소재가 바닥나겠지 싶었는데 의외로 오랫동안 방영 중이다. 회차로는 벌써 239회나 됐고, 아내와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 첫 방송을 시청했으니 햇수로는 꼬박 4년이 넘었다. 그때 갓 태어난 아이는 어느덧 다섯 살 어린이가 되어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지난달에도 어느 금요일 저녁, 습관처럼 TV를 보는데 그날의 주제는 추억의 인디밴드 탑 10이었다. 인디라지만 제법 이름이 알려진 팀들이 등장했다. 델리스파이스, 크라잉넛, 체리필터, 피아 등등. 그러다 어느 순위에 이르자 내 눈을 의심했다. 스푸키바나나의 ‘소방관 아저씨’ 뮤직비디오가 나오는 게 아닌가. 한때 나만의 최애 밴드였던 스푸키바나나. 나는 신이 나서 노래를 따라 불렀다. "헤이, 소방관 아저씨. 내 머릿속에 타는 이 불 좀 꺼주세요." 부러 외운 적도 없는데 그때 그 노래들은 노랫말이 다 기억난다. 하지만 아내는 당최 저런 밴드는 평생 본 적 없다며, 너는 뭐 이런 노래를 알고 있냐는 야릇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표정을 보자 한동안 잊고 있던, 실은 잊고 싶었던 기억이, 마치 오래돼서 녹슨 철문을 열 때 끼익, 하고 나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에 떠올랐다.


 중학생 때였다. 여느 때처럼 학교를 마치고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PC방에 들러 바람의 나라와 스타크래프트와 레인보우 식스를 한참이나 했다. 다들 헤어지기 아쉬워 우리 집까지 함께 왔다. 뭐 재미난 거 없나, 하고 심심해하다 내가 요즘 가장 즐겨 듣는 노래라고 소개하면서 스푸키바나나의 앨범을 틀었다. 인켈 전축 전원을 켜고 미리 앞으로 감아 둔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빨간색 세모 재생 버튼을 딸깍. 나는 '친구들도 이 멋진 음악을 좋아하겠지' 하고 기대하며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기대했던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처음 듣는 음악에 다들 심드렁했다. 특히 친구 C는 뭐 이런 듣도 보도 못한 무명 밴드의 이상한 음악을 듣냐면서 기분 나빠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딴 거 말고 X세대 최신가요 테이프나 틀어보라면서. 그때, 뭐랄까, 나의 취향이라는 걸 함부로 타인에게 드러내는 게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걸 말했을 뿐인데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고, 심하면 손가락질까지 받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그날부터 '좋은 음악은 나만 혼자서 들어야지. 다른 사람에게는 안 알려줄 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요즘 하는 시쳇말로 홍대병을 일찍이 앓게 된 것.


 비단 음악 취향뿐일까. 정치적 성향, 성적 지향, 가치관, 종교와 사상을 드러냈다 핍박받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저 내가 좋아하는 걸 표현하고 내가 좋아하는 걸 다른 이들에게 추천하고, 그게 아니라고 하니 내가 좋아하는 걸 나 혼자서 좋아할 뿐인데. 여전히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세계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쉬이 말하는 걸 여전히 조심스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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