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돌 Dec 10. 2024

치히로네 차가 아우디인 거 몰랐죠

우리가 지난여름에 먹은 것들 (1) : 수박 라테와 이것저것

1. 수박 라테


 회사 근처에 소박한 분위기의 북카페가 하나 있다. 카페 이름은 '뷔크 뮈르달'이다. 카페 주인장 내외가 아이슬란드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머물렀던 마을이 인상 깊어 그곳의 지명을 따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낭만적인 추억을 현실의 업으로까지 이었던 것.


 오가는 직장인들이나 들를 법한 가게에서 책이 팔리기는 할까.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음료 역시 매출이 잘 나올까. 이 메뉴들의 원가는 얼마나 하며 이익률은 어떨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주문을 하고 카드를 긁었다. 신용카드 기계는 두 대였다. 하나는 커피 결제용, 다른 하나는 도서 결제용이었다. 음료 판매는 과세사업이고 출판은 면세사업이니 부가세 신고 때 헛갈리지 않기 위함이구나. 그렇다면 겸영사업자인데 공통매입세액은 과세/면세 비율에 따라 안분해서 불공제액을 계산하겠구나. 회계팀에 몇 년 근무해서 그런지 이런 생각들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낭만보다는 현실의 걱정과 계산을 한다. 어느새 나도 이런 사람이 되어버린 게다.


 엊그제는 띠동갑 아래인 90년대생 후배들과 밥을 먹었다. 어쩌다 보니 대화의 주제가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까지 흘러왔다. 나는 몇 해 전 영화가 재개봉했을 때 극장에서 혼자 본 적 있다 말했다. 영화를 보면서 나 자신에게 흠칫 놀랐다는 고백을 했다. 나이가 드니 어쩔 수 없이 속물적인 사람이 되었음을 느꼈다고. 이유인즉슨 십수 년 전과 달리 주인공인 치히로네가 타는 차가 눈에 들어와서였다. "치히로네 집 잘 사는 거 몰랐죠? 걔네 집 차가 아우디 세단 A4에요. 영화 보는 내내 그게 신경 쓰이더라니까요." 후배들은 금시초문이라며, 정말이냐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곧이어 다들 휴대폰을 들어 영화 이미지를 검색했다. 그리고 동그라미 네 개의 아우디 로고가 보이자 의미를 알 듯 말 듯한 탄식을 내뱉었다. "진짜네요."


 커피를 마시든 영화를 보든 돈 생각만 자꾸 하는 내가 어째 한심스러웠다. 여하튼 지난 계절 이곳의 수박 라테는 맛있었다. 캐러멜 라테인데 캐러멜 시럽 대신 수박 시럽을 넣은 음료. 캐러멜은 달콤하지만 끝맛이 텁텁할 때가 있는데 수박 시럽은 끝맛이 상큼해서 캐러멜의 단점을 누그러뜨려줬다. 이 맛에 반해 여름에만 몇 잔을 마셨는지 모르겠다. 직장 동료들에게도 마치 전도하듯 "여기 수박 라테 꼭 먹어봐요. 진짜 달달하고 맛있어"라며 끌고 갔더랬다. 달콤함에 취하잠시나마 예전의 낭만적이었던 때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2. 아이가 없을 때 텐동과 차슈덮밥, 에스프레소, 소다맛 음료


 오랜만에 아내와 둘이서만 연남동을 산책했다. 마침 아내가 그동안 궁금했던 곳들이 있대서 들러봤다.


 점심을 먹은 연남동 '저스트텐동'은 되게 유명한 가게다. 예전에도 몇 번 들러 봤는데 줄이 너무 길어서 도저히 기다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평일 오픈 시각 즈음에 갔더니 줄이 짧길래 드디어 들어가서 먹어봤다. 유명세를 탈 만큼 맛있었다. 튀김도 차슈도 냉우동도, 그리고 시원한 맥주 한 잔도. 오랜만에 혀가 자극되는 맛이었다.


 후식을 먹으려고 들른 카페는 '피프 에스프레소'. 나는 커피 맛을 잘 모르니까 맛 평가는 생략하겠다. 다만 이름이 그라니따베리인, 얼린 에스프레소와 레몬 소르베 얼음 알갱이들을 섞어서 내 준 음료는 맛있어서 자꾸만 들이켰다. 베리가 떨어져서 레몬을 대신 넣어줬다는데 되려 더 상큼해서 좋았다. 이건 여름에 먹어야만 하는 맛, 이라고 외치는 듯한 맛이었다. 까맣고 하얀 달콤하고 새콤하고 쌉쌀한 얼음이 더위에 지친 몸을 달래줬다.


 연희동 '연희 에스프레소'에 들른 날에는 시그니쳐 에스프레소와 복숭아 소르베와 딸기바나나 산도를 먹었다. 여전히 맛있긴 했지만 왠지 맛이 변한 듯해서 아쉬움이 남았다. 이곳은 비좁던 2층 가게를 떠나 최근에 목 좋은 곳으로 확장 이전했다. 가게를 예쁘게 꾸며 놨는데 마치 인스타그램에서 볼 법한 곳으로 변해 있었다. 여기저기 사진 찍는 손님들도 많아졌다. 봄여름가을겨울이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 봐'라고 노래한 것처럼 모든 건 변하는 법이다.


 커피를 안 좋아하는 나는 종종 불량식품스러운 음료를 마신다. 지금은 문을 닫은 일산 '오피스모먼트'라는 카페에서 즐겨 마신 건 아이스크림 뽕따 맛이 나는 파란색 소다수 위에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스쿱을 얹어주는 음료였다. 초딩스럽다는 평을 듣는 내 입맛에 어찌나 딱 맞는지. 요즘에 2030 당뇨 환자가 늘고 있다던데 조심해야겠다, 는 말을 하면서도 끊을 수 없는 중독되는 맛이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우리끼리만 점심시간을 누릴 수 있으니 유명한 식당에 가서 줄도 서고, 자극적인 맛의 밥도 먹고 술도 한 잔 곁들이고, 진한 커피와 불량식품 같은 음료도 마실 수 있었다. 아이와 함할 땐 먹고 마실 수 없는 것들을. 이렇게 아이 없이 보내는 시간을 때때로 만들어야겠다. 한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던 우리만의 시간. 아이를 키우는 건 지극히 기쁜 일이지만 나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더니 과연 그렇다.






3. 나물 비빔밥


 오랜만에 R 부장과 밥을 먹었다. 회사에서 차를 타고 꽤 달려서 일산 장항동에 위치한 '초성공원'이라는 식당에 갔다. 가게 이름에 웬 공원이 붙어 있지, 대체 뭘 하는 집이길래 이런 이름을 붙였나, 했더니 비빔밥집이란다. 검색해 보니 이곳은 유명한 집이었다. 직접 기른 열댓가지 나물에다 직접 담근 장들을 비벼먹는데 건강식으로 입소문을 타 TV에도 몇 차례 출연했다 한다.


 고작 나물 따위를 이 돈을 주고 먹어야 하나, 했지만 먹어보니 입맛이 동해서 금방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왠지 아쉬워서 미처 비비지 못해 남아있는 나물도 연거푸 집어 먹었다. 먹으면서 남은 하루의 계획에 대해 생각했다. 오늘은 몸에 좋은 걸 먹고 저녁에 아이를 재우고 운동도 나갈 테니 건강한 하루구만. 작년 건강검진 때 콜레스테롤 수치가 심각한 상태라고 해서 나름 관리 중이다. 평생 운동이라곤 담쌓고 살았는데, 주중에는 점심시간에 회사 헬스장에 가고 주말 저녁에는 홍제천에 달리기를 하러 나간다. 이제 몸을 챙길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엊그제 올해의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다. 콜레스테롤 수치는 거의 정상범위로 나왔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숫자가 줄어들었음에 다소 안심됐다. 웬일인지 키도 아주 조금, 0.5cm 만큼 컸다. 아내에게 농반진반 나는 아직도 성장기 청소년이야,라고 자랑했다. 하지만 체지방률은 오히려 2퍼센트 포인트가 늘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이르게 찾아온 골다공증이 여전히 문제라는 지적도 있었다. 이건 대체 뭘까. 아이와 함께 우유라도 마셔야 하나. 그러면 키가 더 클 수도 있겠는데, 이런 추세라면 진짜 10년 뒤엔 180cm겠다. 신난다.





4. 우동과 맥주


 분명 주중에는 점심때 회사 헬스장에 가기로 해 놓고선 하루도 못 갔던 때가 있었다. 이상하게 약속이 계속 잡혀있던 주였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이틀 정도는 저녁에 나가서 따릉이를 탔다. 아이를 재우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와서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한여름이지만 자전거를 달리며 맞는 밤바람이 선선했다. 홍제천을 타고 한강 방향으로 갔던 날은 성산대교까지, 반대 방향으로 갔던 날은 홍지문까지 찍고 돌아오곤 했다.


 홍지문을 거쳐 부암동까지 갔던 날. 그날따라 왠지 더 달려보고 싶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올림픽 시즌이어서 덩달아 나도 흥분했나 보다. 끝까지 가 보자, 하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앞으로 달렸다. 홍지문을 지나 부암동, 그리고 석파정을 거쳐 윤동주문학관에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1시간가량 자전거를 탔더니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오금이 당겨서 돌아가는 길에 또 페달을 밟을 자신이 없었다. 자전거를 반납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기어가듯 걸어갔다. 간신히 막차를 타고 우리 동네로 돌아왔다.


 이제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버스 종점 인근에 위치한 '도깨비우동'이라는 가게가 보였다. 동네에서 제법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다. 시원한 국물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콧속으로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뭐에 홀린 듯이 바삐 걸어 들어가서 맥주와 즉석우동을 주문했다. 땀 흘리고 난 후라 그런지 기가 막힌 맛이었다. 매콤한 우동 한 젓가락, 시원한 맥주 한 잔, 우동 한 젓가락 더 먹고 새콤한 단무지도 한 입 베어 물고. 땀을 흘려가며 배부르게 먹었다.


 가게를 나오면서 마음속에 죄책감이 불 같이 일었다. 대체 이렇게 처 먹을 거면 운동을 한 건가. 그래도 운동을 했으니까 이래도 되는 거지, 하며 자기변명을 했다. 누굴 위한 건지 변명거리를 찾다가 맥주 반 잔 정도는 남겼다는 사실에 혼자 위안다. 내일부터는 절대로 밤에 아무것도 안 먹어야지, 하는 지킬 수 없는 약속도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