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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Apr 27. 2020

빨간 줄 두 개 이후의 새로운 세계

쉽게 쓰여진 시도 아니고 쉽게 생긴 아이라니




 설마설마했다. 빨간 줄 두 개라니. 선명한 두 줄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아이를 갖자고 결심한 지 불과 한 달도 안 됐는데 이렇게 금방 생길 리가 있나. 아내는 서른여섯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 게다가 지난해 자궁내막증으로 입원했던 이후로 계속 약을 먹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임신이 어려울 거라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뜻밖의 병증 때문에 아내가 구급차에 실려갔던 그날은 평소와 다름없던 금요일 새벽이었다. 자다가 깬 아내가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로 가는 걸 비몽사몽 간에 들었던가. 갑자기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너무 아팠던 아내가 급기야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것. 아이스버킷 챌린지에서 얼음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 쓴 듯 잠이 번쩍 깼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겁지겁 119 구급차를 부르고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검사를 해 보니 염증 수치가 너무 높으니 입원을 하란다. 왠지 여기보단 조금 더 멀리 있는 신촌 세브란스가 나을 것 같아서 전원 신청을 했다. 기왕이면 더 큰 병원, 그중에서도 대학 병원에 더 믿음이 가는 걸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기껏 찾아간 세브란스 응급실에는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물경 4시간을 넘게 기다려야만 했다. 큰 병원이라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았다. 염증 수치가 떨어지는 모습을 매일 마음 졸이면서 확인했다. 지난 밤 아내를 아프게 했던 건 자궁내막증이라는 병이었다. 그런 병명은 난생처음 들었다. 금방 나아서 퇴원을 할 수 있는 병이 아니었기에 역시나 난생처음 병실 침대 옆에 마련된 보호자용 간이침대에서 2주 간의 간병 생활을 하게 됐다. 모르는 사람에게 아내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 아침에는 화장실에서 대충 세수와 면도를 하고 출근했다가 퇴근하고는 곧장 병원으로 돌아왔다. 늦은 저녁을 먹고 보호자용 샤워실에서 씻은 후 아내 옆에 누워 걱정에 젖은 채 잠에 드는 생활을 며칠째. 옷이며 칫솔 따위는 주말에 잠깐씩 집에 들러 챙겨왔다.

 

 병원의 하루는 생각보다 길었다. 환자는 병과 싸우고 간병인은 시간과 싸우게 된다더니 과연 그랬다. 내가 치료를 하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니라서 옆에서 딱히 할 일이 없다. 황진이의 싯구절처럼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어디다 담아 둘 수도 없으니 작심하고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을 가져와서 읽거나, 그동안 미뤄왔던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첫 회부터 몰아 보거나, 하릴없이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며 시간을 때웠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창문 블라인드 틈 사이로 얼핏 비치는 하늘이 어찌나 푸르고 맑던지. 창 밖으로 보이는 병원 밖의 가을날 풍경은 아름다웠다. 날씨도 좋고 하늘도 좋고 단풍도 좋고 햇살도 좋고, 모든 게 다 좋아서 바깥에 나갈 때마다 홀로 이런 걸 누리기엔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서 나눠 가진다 해도 차고 넘칠 만큼 반짝거리는 장면들이 밖에서 매일같이 펼쳐지고 있는데 이렇게 병원에 누워 있으니 아까울 따름이었다.


 아내가 잠들었을 땐 혼자서 병원 이곳저곳을 산책했다. 어느날엔 3층 로비에 있던 기적의 우체통이며 소원 편지함, 그리고 아직은 일러 보이던 크리스마스 트리에까지 발길이 닿았다. 제발 아프지 않게 해 달라는 간절한 바람들이 여기저기에 매달려들 있었다. 트리 전구에 불이 반짝 들어오자 꼬마 환자들이 아픈 와중에도 신이 나서 까르르 웃어댔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이렇게나 일찍이들 아픈 것이냐, 차례도 지키지 않고 너네가 왜 먼저. 우리에게 아이는 없었지만 왠지 부모의 심정이 느껴지는 듯해서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아이보다는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팠으면 하는 게 부모 심정이겠지. 아내가 아픈 것도 힘들어서 못 견디겠는데 아이가 아픈 건 대체 얼마나 힘들지 가늠이 안 됐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불필요한 근심의 싹을 구태여 하나 더 틔울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시간은 더뎠지만 어떻게든 흐르는지라 마침내 퇴원날이 되었다. 아내는 앞으로 매일 약을 먹어야 한다는 후속 처방을 받았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막증 재발을 막기 위해 여성 호르몬을 억제하는, 그런 약이라고 했다. 또 병원에 실려갈 수 없으니 성실하게 약을 잘 챙겨먹던 아내. 몇 달이 지나자 주치의 선생님께서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임신 생각이 있다면 약을 잠깐 끊고, 생각이 전혀 없다면 계속해서 복용하자고. 아내의 나이도 있는 편이니까 고민을 해 보라는 말씀이었다. 더불어 임신이 어려울 수 있으니 산부인과가 아니라 난임클리닉 쪽으로 전과시켜 주겠다는 말씀도 덧붙였다.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곧바로 아내에게 말했다.


 “당연히 약 먹을 거지? 나는 아이 같은 거 필요 없어. 너만 있으면 돼. 그냥 네가 안 아팠으면 좋겠어.”


 “음... 아니야. 아이를 한 번 낳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생각지도 못한 아내의 대답이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거 배 배 배... 배신이야 배애씨이인. 나도 모르게 영화 <넘버 3>의 송강호처럼 말을 더듬으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격하게 반응했다. 우리는 아이 없이도 몇 년째 충분히 행복한 결혼 생활을, 만난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둘만으로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잖아. 식당이나 카페, 미술관이나 공원에 갔을 때 종종 마주쳤던 시끄럽고 울부짖고 제멋대로 하겠다며 떼쓰는, 마치 새끼 악마같던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느라 진땀 흘리는 부모들을 보면서 둘 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하곤 했잖니.


 우리는 아이 때문에 저렇게 살지 말자고.


 이렇게 둘이서만 행복하게 살자고. 계절마다 이곳저곳으로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맥줏집에서 밤새도록 술도 마시고, 육아 고민 따위 없이 일도 취미생활도 마음껏 다 해 보자고. 그래서 아이가 밤새 울어대느라 잠 한 숨 못 잤다며 눈이 벌게져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 안쓰럽다고 혀를 차면서 짐짓 놀리기도 했고, “살면서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엄청난 행복을 맛볼 수 있다.”던 동기 H형의 꾐에는 “예예, 그러시겠쥬”, 하고 몰뚱하게 대답했고, “세상에 태어났으면 내 유전자 하나는 남겨놔야 된다.”는 Y 과장의 말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나면서 고난으로 가득 찬 삶을 뭐하러 도돌이표처럼 대물림해야 하냐고 항변했고, “결혼했으면 당연히 애 낳아야지, 그럴 거면 평생 연애만 하지 뭣하러 결혼했냐.”는 K 부장의 느닷없는 꼰대질엔 옥상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욕지거릴 하며 화를 풀었더랬다. 아내 역시 왜 아이를 낳지 않느냐는 주변의 오지랖에 나와 비슷한 대답을 해 왔을 터였다. 저희는 아이 낳기 싫다구요. 그만 좀 괴롭히십시오, 라고.


 그런데 사람이 아프고 나면 변한다더니. 주변의 갖은 회유와 겁박,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끈끈한 동지애를 자랑했던 아내가 이토록 갑작스레 변심할 줄 몰랐다. 아내는 아이를 ‘안 낳는’ 게 아니라 '못 낳게' 될까 봐 덜컥 두려워졌다고 했다. 갑작스런 입원과 퇴원, 이후 수 개월 간 약을 먹었던 시간 동안 혼자서 많이 고민했다고 심경 고백을 했다. 임신이라는 건 인생에 다시 못 올 소중한 기회일 수도 있으니 그저 날려 버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리고 단서를 덧붙였다. 올해까지만 시도해 보고 결국 임신이 안 되면 거기서 그만 하고 우리 운명을 받아들이자고. 굳이 시험관이니 뭐니 하는 시술을 받아가면서까지 억지로 아이를 낳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었다. 아내가 그렇다는데 별 수 있나.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았어, 그럼 앞으로 딱 다섯 달만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진짜 올해까지만 해 보는거야.”


 그래서 결국 난임클리닉으로 가서 '임신 시도일(?)'을 받아 오기로 했다. 중후한 얼굴의 클리닉 의사 선생님께선 아내의 생리일이며 주기며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니 달력을 가리키며 이 날짜 즈음에 관계를 가지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 길일을 점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힘찬 목소리로 대답하자 선생님께서는 푸훗, 하고 미처 삼키지 못한 웃음의 조각들을 내뱉으셨다. 뒤돌아 앉아있던 간호사 선생님도 어깨를 들썩거리는 걸 보니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웃는 게 틀림없었다. 이분들께는 내 대답이 무척 우스운 말이었나보다. 하긴 여기가 난임클리닉인만큼, 도무지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만 매일같이 만나다가 이렇게 해맑은, 혹은 철없어 보이는 남편이란 그들이 처음 마주하는 존재였을 게다. 왠지 부끄러우면서도 얼굴을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난임 부부들에게 미안해졌다. 누군가에게는 절실하고도 고달픈 일일 텐데 나는 너무 쉽게만 생각하고 있었구나.


 우리는 점지해주신 길일에 성실하게도 몇 차례 '시도'를 했다. 시도를 시작한 바로 그 달 말 즈음, 매월 아내에게 찾아오던 소식이 이상하게 늦다는 걸 깨달았다. 아내는 소식의 주기가 늘 일정했는데 어째 이번 달엔 많이 늦다. 설마 이렇게 금방 생긴 건가. 말도 안 된다. 난임으로 몇 년씩이나 고생하던 사람들이 주변에 드물지 않았는데 임신이라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일 리가 없다. 대학 동기 S도 몇 년이나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결국 시험관 시술을 받아 쌍둥이 아빠가 됐고, 친구 D 역시 의학 기술에 힘입어 간신히 아들을 얻었으며, 회사의 J 과장 역시 거의 포기했던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임신이라는 축복을 받았다고 했다. 본인이 원했음에도, 이유를 짐작 가능한 감감무소식에 왠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아내의 기분을 풀어 줄 겸 이번에도 시답잖은 농담을 던졌다.


 “알고 보니 나 정자왕이었던거야?”


 난임클리닉 선생님과는 달리 아내는 내 말에 웃지 않았다. 이제는 농담할 때가 아니구나. 실패한 농담 이후의 어색한 적막을 참을 수 없기라도 한 듯 곧바로 약국으로 달려가서 임신테스트기를 사 왔다. 여전히 아이를 갖고 싶다는 마음은 썩 들진 않았지만 궁금한 건 궁금하니까. 확인은 해 봐야 할 터. 포장지를 뜯어서 꺼낸 테스트기는 작고 볼품없었다. 고작 이런 걸로 임신 여부를 알 수 있다니 사람의 몸이라는 게 신기하다. 정말 신기한 일이 생겼는지 어디 한 번 보자꾸나.


 그리고 2019년 9월 1일 오전, 우리는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음을 확인했다. 테스트기에는 선명한 빨간 줄 두 개가 떠오르고 있었다. 색이 선명해질수록 머리는 흐릿해지는 게, 이게 과연 현실이 맞나 싶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곰곰이 날짜를 따져보니 아이는 선생님의 말씀대로 길일이었다는 광복절 즈음에 생긴 듯하다. 그분 용하시다 정말. 돗자리 깔으셔도 되겠는데. 나 역시 용하다 정말. 이 정도면 아마도 한 방에 성공한 건데. 원샷원킬, 아니, 원샷원라이프다.


 아직 섣부른 감이 있지만 그 사이에 태명도 지었다. 광복절에 새 생명이 잉태되었으니까 이름을 ‘복이’로 하자. 광복의 그날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고, 복덩이라는 의미도 있는 중의적인 단어였다. 꿈보다 해몽이다. 그러고 보니 우린 아이를 애타게 기대하지도 않았고 둘 다 특별히 꿈을 꾸지도 않은지라 태몽이 없었다. 나중에 복이가 “아빠 엄마, 나 생겼을 때 태몽이 뭐였어?”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어디 가서 꿈을 하나 사 올 수도 없는 노릇이니 걱정이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질 것도 아닌데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때문에 벌써 걱정이다. 아이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다더니, 임신 테스트도 해 보고 예정일을 계산하고 태명도 짓고 앞으로 해야 할 체크 리스트를 작성하고 냉장고의 술을 죄다 내다 버리면서 마치 본래 계획이라도 한 듯 움직이게 된다. 실은 나 역시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아이를 바라고 있었던 걸까. 혹은 생물학적 부모라면 응당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유전적 프로그램이 발현된 행동인 걸까.


 기분이 좋으면서도, 이게 정말 현실인지 어쩌면 꿈이 아닐까 하며 믿기지도 않고, 내가 아빠라니 신기하고 얼떨떨하기도 하면서, 괜스레 이제 새로이 조우하게 될 미지의 세계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나 걱정스럽기도 불안하기도 하고. 뭐라 한 단어를 딱 끄집어내서 이 복잡 미묘한 기분을 표현해보라 하기가 어렵다. 아내도 나와 마찬가지로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듯한 표정이다. 웃으면서도 우는 듯한 얼굴. 임신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마주 보고 포옹을 하며 “Oh my gooooood! I Love you, baby”, “Congratulation!” 같은 달콤한 축하 인사를 건네고, 행복으로만 가득한 표정을 짓거나, 낯 간지러운 문구가 쓰여진 케이크에 꽂힌 촛불을 후 하고 불면서 왁자지껄 소동이 벌어질 거라 상상했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여러분, 그거 다 거짓말입니다. 못 믿겠으면 임신 한 번 해 보세요.” 길을 걷던 낯선 이들 중 아무나 붙잡고서 귀에다 대고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마치 커다란 비밀을 홀로 알아버린 사람이 남들에게 그걸 말해주고 싶어서 안달나 못 견디게 된 것처럼.


 어라, 이게 뭐지, 하는 혼란스러움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열 달 뒤에 세상에 나온 아이를 마주하고서도 어라, 이게 뭐지, 라고 반응할까 봐 걱정되기도 한다.


 “우리, 잘할 수 있겠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아내가 나에게, 내가 아내에게 이렇게 묻고 답한다. 우린 아이를 그리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이제부터 아이가 함께하는 세계를 살게 됐다. 별일없이 평탄하게 돌아가고 있던 삶의 궤도에 난데없이 끼어든 손님이 하나 생겼다. 어떤 손님일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동안 접해 보지 못했던 아주 낯설기만 한, 빨간 줄 두 개 이후의 새로운 세계가 시작됐다.





혹시나 몰라서 다음날 한 번 더 테스트를 해 봤다. 선명한 두 줄이다. 이 정말 현실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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