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는 건 주름살이 늘고 마음과 몸이 약해진다는 것 외에 헤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것도 있다.
어제 오랫동안 병환 중에 있던 둘째 올케가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받았다.
아픔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게 죽음이라니... 장례식장이 있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이 착잡하다.
인생은 한 권의 소설처럼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의 과정을 거친다. 소설 속의 갈등은 글의 재미를 추구하지만 삶에서의 갈등은 고통 그 자체다. 병석에 오래 누워계신 올케 언니의 삶에서 절정은 언제였을까?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와 처음 만나던 날을 발단으로 한 권의 소설을 읽듯 올케언니의 삶을 반추해 본다.
위로 오빠만 넷을 둔 나에게 언니라는 말은 무척
낯선 단어다. 그런 나에게도 언니가 생겼다. 큰오빠가 결혼해서 새언니가 생기고 얼마 후 둘째 오빠가 사귀는 애인을 집에 데리고 왔다. 허리 잘록한 모슬린 원피스를 입고 양산을 쓴 채 대문으로 들어서는 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예쁘고 선한 얼굴의 언니가 내 오빠의 각시가 된다는 게 무척 신이 났던 모양이다.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던 기억이 난다.
총각시절 멋쟁이였던 둘째 오빠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세차장 사업을 시작한 오빠의 모습은 늘 물에 젖어 후줄근하였다. 그런 오빠 곁에서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있는 언니가 좋았다. 언니보다 예쁜 딸을 둘이나 낳고 세 번째 잘생긴 아들을 낳아 기를 때가 언니인생의 절정기였을까?
언니는 오십 대 후반에 파킨슨이라는 무서운 병을 얻었다. 완치는 없고 다만 병의 진도를 늦추는 방법밖에 없다고 하였다.
점점 심해지는 육체의 떨림과 나약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지 형제들 모임에 빠지기 시작한 지 오래,... 마지막 모습을 뵈었을 때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지만 기억만은 명료하여 옛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게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지라 언니와 나의 인연은 또 다른 인연을 만들었다. 남편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언니의 친정엄마이다. 남주기 아깝다던 사돈처녀를 가까운 친척에게 소개했고 친척은 자신의 친한 친구의 아들에게 인연을 만들어 주었다.
지금 남편과 나는 나란히 앉아 언니의 마지막 모습을 뵈러 내려가고 있다.
두렵다. 그리고 슬프다.
소설의 첫 장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분홍양산을 쓰고 대문을 열고 들어서며 수줍게 웃던 언니의
모습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