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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우 Mar 23. 2019

영화 <우상> _ 딸딸이 영화.

주제와 만듦새의 일치. 과유불급.

*완전히 주관적인 리뷰.


  누구나 저마다의 우상을 가지고 살아간다. 다른 말로 하자면 ‘누구나 저마다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종교를, 부모를, 위인을, 아이돌을 우상화하고 그것들을 믿는다. 우상을 통해 우리는 소속감과 안정감, 용기와 희망을 얻는다. 하지만 신념을 가치관, ‘나’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마력을 가진 믿음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믿는다’가 ‘믿어 의심치 않는다’가 될 때 초점은 뚜렷해지고 시야는 좁아진다. 영화 <우상>은 이 ‘믿음의 과유불급’을 풀어낸다. 아니 풀어내고자 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제각각의 ‘우상’을 향해 나아간다. 유중식(설경구)은 살해당한 아들과 련화 뱃속에 있는 손자를 위해, 구명회(한석규)는 자신의 정치인생을 위해, 최련화(천우희)는 정착해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영화는 이러한 인물들의 우상을 전달하는데 있어 서사보다는 세밀한 묘사의 방법을 택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영화의 균형은 온통 작가의 특수한 표현방식으로 쏠리며 맥락은 휘발되고 자극적인 단상만 남는다. 영화 속 대부분의 것들은 과잉되어 있다. 이러한 <우상>의 모양새는 영화가 전달하려는 주제와 닮아있다. ‘과유불급’     


 첫 번째 과잉은 메타포이다. 제 아무리 깊고 심오한 의미를 내포한 메타포일지라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면 안하느니만 못하다. 감독은 강박적으로 매 장면마다 소도구를 이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려 애쓴다. 유리벽, 거미줄처럼 얽힌 치킨, 닭 모가지, 이순신 동상, 물웅덩이, 예수 등등 쉴 틈 없이 등장하는 은유들은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 아닌 해석을 강요하는 듯 보였다.


 두 번째 과잉은 인물이다. <우상>의 주요 인물들은 하나같이 드센 것이 마치 <아수라>의 남자들을 연상시킨다. 동기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채 인물들은 저마다의 욕망에 이글거린다. 특히 구명회와 최련화의 액션은 과감하다. 목적을 위해 댕강댕강 서슴없이 살인을 행한다. 구강액션은 더 심각하다. 대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리소리를 질러대는 것은 물론, 리얼리즘, 다큐멘터리를 능가하는 수준의 연변사투리를 구사한다. "(불필요할 정도로) 능동적인 주연들에 비해 조연들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일일드라마에 나올 법한 싸가지 없는 한석규의 엄마는 뜬금없이 등장해 설경구와 천우희를 자극하고, 무능력한 경찰들은 CCTV에 담긴 결정적인 단서를 놓친다. 양극단을 오가는 인물들의 관계 속에 쌓이는 것은 피로감뿐이다.    

작위적인 한석규 엄마의 자극에 발끈하며 살인을 예고하는 천우희... 하....

  

 마지막 과잉은 감독의 시선이다. ‘믿을 사람이 없거나 사람을 믿지 못하는’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점을 말하고자 하는 감독은 정작 표현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는 의심이 없어 보인다. 또 다시 연변, 조선족을 꺼내들어 손쉽게 인물들을 난도질한다. 장애를 가진 아들을 잃은 불우한 프롤레타리아 가장을 전시하며 ‘사회비판’이라는 미명 아래 ‘동정심=몰입감’이라는 본심을 숨긴다. 사이코패스 기질을 지닌 듯 살인 이후 실소를 연발하던 구명회의 아들은 목을 그어 자살기도를 한다. 감독은 강렬한 표현이라는 ‘가상’이 현실의 ‘진실’을 표현하기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님 그것이 본인 영화의 깊이를 만들어준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분노하는 프롤레타리아 가장, 상업영화 싸구려 신파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


 만약 감독이 나와 같은 관객들에게 일어나는 거부반응을 의도했다면 이 영화는 대성공이다. 영화는 공허한 불편함, 과잉된 표현방식, 뒤틀린 감독의 시선을 통해 관객들에게 영화의 주제를 호소한 것이다.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믿게 허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제.” 영화는 프로파간다식의 연출을 통해 프로파간다의 역설을 관객이 직접 인지하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바라본다면 100억 원 이상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144분간의 ‘딸딸이 영화’도 나름의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극 중 설경구의 대사를 인용해 이 영화의 당혹스러움을 표현해보고자 한다. “제가 부남이 열 세 살 때 딸딸이를 쳐 줬어요 그랬더니 하아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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