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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우 Dec 14. 2019

권력들에 일그러진 개인들의 초상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에세이

         

  학교는 사회와 유사한 특성을 띤 축소판이 아니다. 엄연한 사회 그 자체이다. 아니 오히려 압축되어 사회의 속성을 더 날카롭고 정확하게 드러내는 사회의 표본이다. 교실에는 모든 사회적인 표상들이 모여 있다. 수많은 개인들이 있고, 그 개인들이 상호 간에 맺은 계약이 있으며 그 법률로 인해 선출된 자가 있고 그 소수들이 손에 쥔 권력이 존재한다. 이 공간은 사회로 진출하기 위한 법을 가르치는 기관이 아닌 하나의 소사회다. 그렇기에 우리는 초등학교로 진학하는 순간 수많은 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작동되는 사회의 규칙을 인식하게 되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법칙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된다. 아이들로 구성된 학급이라는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이 있다면 어른들의 사회를 모방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관찰과 경험에서 비롯된다. 아이들은 부모의 언행과 습관, 그들이 권력을 다루고 폭력을 행사하는 방법을 모방해 자신의 것으로 습득한다. 그렇게 간접적인 부모의 교육을 통해 어른들의 사회는 아이들의 사회로 이식된다. 

 1992년에 개봉되어 큰 호평을 받은 박종원 감독의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은 그러한 학교 사회의 속성과 그 작동방식을 치밀하고 영리하게 포착하는 영화 중 하나이다. 이문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적절한 각색과 효과적인 연출을 통해 원작의 주제의식과 표현방식을 한층 더 확장시킨다. 그간 학원물을 소재로 그 안의 부조리를 다룬 수많은 영화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단연 고전으로 손꼽히는 것은 이 영화가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을 명민하게 함축해내고 앞서 언급한 학급이라는 소사회 그 자체를 핍진성 있게 묘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에 1년 앞서 한국에서 개봉한 또 다른 명작 <죽은 시인의 사회(1990)>가 개인들의 이상과 현실이라는 코드에 보다 초점을 맞췄다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개인을 중심으로 하되 그 사이에 놓여 있는 거미줄 같은 비가시적인 권력을 묘사하는데 집중하며 보다 사회적인 영화의 코드를 유지한다. 그렇다면 과연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얽히고설킨 권력을 가시화 하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앞으로 영화의 공간 묘사, 인물들의 변화들을 해석해보며 영화가 학교라는 사회 속의 부조리한 권력을 드러내는지 살펴볼 것이다.    

 

2. 단절과 이동     


  차창 밖의 풍경을 비추던 카메라가 왼쪽으로 패닝하며 기차 안을 비춘다. 이윽고 어른이 되어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주인공 병태의 모습이 나온 뒤 화면은 다시 좌에서 우로 이동해 밖을 보여준다. 타이틀이 등장한 뒤 화면은 이전과는 반대로 우에서 좌로 패닝하며 시간은 과거로 변한다. 서울에 살던 우등생 병태는 아버지의 사정으로 인해 시골로 내려가고 있다. 시골은 병태에게 단절되어 있었던 미지의 공간이자 미지의 사회이다. (이후 병태는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기차역을 찾지만 기차에 오르지 못한다.) 온화한 환경 속에서 지내왔던 병태가 기차를 타고 공간을 이동해가는 모습은 그가 곧 맞이할 변화를 암시하는 듯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엄석대라는 절대 권력자가 통치하고 있는 독재 사회였다. 병태는 나름의 자존심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지만 이내 엄석대의 정치적 전술 아래 무릎을 꿇고 만다. 엄석대의 술수는 바로 병태를 ‘단절’시키고 ‘고립’시키는 것이다. 병태는 석대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며 민주주의적인 학급 상태를 만들려 애를 쓰지만 매번 실패하고 만다. 이는 석대의 권력의 하수인들인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과 그를 알면서 묵살하는 선생님의 도움을 통해 묵살된다. 몇몇 친구들을 꼬드기기 위해 극장을 데려가기도 짜장면을 사주기도 하지만 석대는 그 아이들에게 곧바로 낙인을 찍어버리며 변혁의 꼬리를 자른다. 아이들은 서서히 병태를 따돌리기 시작하고 그를 무시하기 시작한다. 병태의 사회적 성원권은 점차 사라져 간다. 이러한 사회적인 관계의 단절은 학교의 유리창을 통해 나타난다. 병태는 친구의 라이터를 훔쳐간 석대를 고발하기 위해 교무실을 찾는다. 그리고 그 앞에서 유리창 너머의 교무실을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담배를 피며 장기를 두고 있는 무기력한 어른들이 존재한다. 이어 그들을 바라보는 병태의 눈이 클로즈업 된다. 역시나 어른들은 진실을 듣지 못하고 들어볼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유리창을 통해 병태의 단절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은 바로 유리창 청소 시퀀스이다. 5학년 2반은 특이한 규율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급장인 석대가 담임선생님의 권력을 위임받아 급우들의 청소 검사를 하는 것이다. 석대는 다른 아이들을 모두 통과 시켜주고 오직 병태와 영팔이 만을 불합격 시키며 계속해서 청소하게 만든다. 그 시각 다른 아이들은 축구대회를 하며 사회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유리창을 아무리 닦아도 통과될 수 없는 단절의 벽을 마주한 병태는 멍하니 창문 밖의 아이들을 응시한다. 이 강력한 단절의 공포심을 겪은 후 그는 완전히 석대에게 굴복하게 된다. 

  그렇게 병태는 석대라는 권력과 친밀해진다. 이는 병태의 자리를 통해 명백히 드러난다. 전학 온 초반 장면 석대의 옆에 있던 그의 자리는 혁명에 실패하며 가장 먼 앞쪽 창가 자리로 좌천되게 된다. 그는 그렇게 사회적으로 유배당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유리창 사건 뒤 석대에게 누구보다 낮게 머리를 숙이며 그의 자리를 점차 석대 옆으로 이동된다. 김 선생이 왔을 후반부에는 병태가 석대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권력은 자리를 만들고 자리는 권력을 만든다.     


3. 또 다른 석대우리들     


 석대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절대적인 악의 축을 담당하는 듯 보인다. 그는 항상 강한 모습을 보이려 감정변화를 드러내지 않으며 냉철하고 단호하게 상황을 판단한다. 그리고 자신의 리더십을 믿으며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엄석대는 왜 이러한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며 그러한 행동을 저지르는 엄석대를 완전한 악의 존재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악의 근원은 누구인 것일까?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답해보고자 한다. 엄석대의 권력에 굴복하기로 한 병태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석대의 그림을 대신 그려준다. 둘은 서로의 그림을 바꾸기로 하는데 병태의 도화지에는 선명한 엄마의 형상이 그려져 있는 반면 석대의 그림은 얼굴이 텅 비어 있는 모습이다. 이에 어떤 상념에 빠지는 듯한 석대의 표정이 이어 붙는다. 그리고 석대와 병태 둘이 기찻길을 따라 걸어가는 장면에서 석대는 병태에게 창신동을 아냐고 묻는다. (당대 1960년대 창신동은 사창가로 성행했던 곳이다.) 왜 물어보냐는 병태의 되물음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 뒤 내뱉는 석대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너 어머니 예쁘시더라.”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석대의 어머니가 돈을 벌기 위해 화류계에 몸을 담으며 석대를 버리고 서울로 도망쳤다고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다. 오롯이 그것 때문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어머니의 부재가 석대의 성격을 형성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석대의 결핍이 어슴푸레 드러나고 병태도 권력의 틀 속에서 자리를 찾아가려는 시점, 김 선생의 전임을 기점으로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가파르게 치닫기 시작한다. 김 선생은 ‘진실과 자유’라는 글자를 칠판에 적은 뒤 아이들에게 거짓말 하는 건 절대로 용서 할 수 없다며 자신의 철학을 내비친다. 굉장히 교육적인 신념이 청렴해 보이는 김 선생은 점차 반 아이들의 권력 구조를 인지하게 되고 결국 엄석대의 부정부패를 찾아내는데 이른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학교라는 사회를 당대 어른들의 사회와 꽤나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며 비판하기 시작한다. 부정적인 선출방법으로 인해 엄석대만 적혀 있는 투표용지를 확인하던 김 선생 뒤로 흘러나오는 라디오에서는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관한 정보가 흘러나온다. 김 선생은 마치 정의의 사도처럼 그동안 부당한 방법을 통해 권력을 남용한 엄석대를 엄벌하고 이러한 혁명 앞에 그간 침묵하고 방관했던 반 아이들은 독재자의 잘못을 술술 불기 시작한다. 그리고 반 아이들 모두가 책상 위로 올라가 체벌을 받게 된다. 진실을 침묵했던 모두가 죄인이었던 것이다. 이 ‘모두’에는 학생들을 훈계했던 김 선생마저 포함된다. 결국 김 선생 또한 훈계의 방법으로 폭력을 선택한다. 윽박을 지르며 회초리질을 하며 반의 권력을 휘어잡는다. 동료 선생님들은 유리창 너머로 폭력을 통한 정권 교체의 장면을 관람하듯 방관한다. 이러한 폭력은 폭력의 반복만을 낳을 뿐이지만 김 선생은 그것이 정의이자 진실이라 착각하는 듯하다. 그는 시간이 흐른 뒤 마지막 장면에서 금배지를 단 국회의원으로 등장한다. ‘진실과 자유’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 된 김 선생을 바라보는 성인 병태의 눈빛은 절망적이고 회의적이며 허무해 보인다. <초록물고기>의 큰 형처럼, <살인의 추억>의 박노식과 같이 영화중 가장 순수했고 정직했던, 진실을 보는 바보 같은 존재 영팔이의 말이 맞았다. “니들 다 나빠!”     



3. 결론     


  4.19 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이 하야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독재와 폭력 정치의 씨앗들을 자라났으며 그 뿌리를 뽑기 위해 나라는 열병을 앓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오늘날, 지금 여기 대한민국은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지닌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며 공감되고 분노하게 되는 것은 아직까지도 무소불위의 권력들과 불평등한 부조리들, 그리고 그것을 방관하는 우리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취를 감춰 그 정체를 알 수 없게 된 엄석대의 모습으로, 한 때 민주적인 투지를 강조했던 김 선생, 아니 김 의원의 모습으로, 힘없는 인텔리가 되어버린 한병태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에 무감각해져 있을 어느 무렵 그 부조리들은 언제 어떻게 다시 부활해 우리를 삼킬지 모른다. 영화는 시간을 관통해 현재의 우리들에게 다시금 이 사회의 상을 스크린 위에 재생시킨다. 누군가를 단절시키는 낙인찍기의 사회를, 언론과 검찰과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에 어떻게 우리가 지배당하고 굴복하는지를 말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며 우리는 영웅이라는 권력에 일그러지지 않기 위해서 영웅을 바라보는 제대로 된 안목을 키워야 한다. 특히나 모방의 객체가 되는 어른들은 다시 대답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사회인 학교가 어떻게 미래 사회를 밝힐 길잡이가 될 수 있을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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