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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아 Jul 10. 2024

상실, 남아있는 고통에 대하여#08

혼미했던 여름의 끝에서

08. 혼미했던 여름의 끝에서



베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차다. 아침에 일어나면 카디건을 걸치게 된다.  어젯밤엔 얇은 여름이불이 허전해서 좀 더 포근한 차렵이불이 생각나는 초가을 밤의 날씨였다.
그렇게 뜨겁고 고통스러운 여름이... 시우를 보내고 모든 것이 혼미했던 여름이... 이제 지나가나 보다.


사고 다음날 병원의 행정처리를 위해 칸차나부리에서 방콕의 경찰병원으로 가던 중이었다. 주유를 하기 위해 들린 휴게소에서 아스팔트를 일렁이게 하던 그 뜨겁던 그날의 공기가 여기 한국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었다. 아니 더 뜨거운 막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고 숨 막히는 더위가 한국에 돌아와서도 두 달 내내 이어졌다.
그날 태국의 휴게소엔 관광객들을 실은 미니밴들이 많았다. 달아오른 아스팔트는 이글거렸고 사람들은 저마다 가족 또는 친구들과 여행의 기쁨과 즐거움에 들떠서 행복한 모습이었다. 나만이 처절한 절망으로 가득한 진공상태로 그들과는 다른 세상에 격리된 것 같았던 그날,, 그 뜨겁고 지옥 같던 그날처럼 올해 여름은 유난히 뜨거웠다.

몇십 년만의 폭염에 나의 육체와 정신은 혼미해져서 모든 것이 불투명한 지경으로 그렇게 두 달을 보냈다.
어쩐 일인지 작년에 이사하면서 이전 설치한 에어컨이 가스가 새나갔는지 작동이 되지 않았다. 기사들이 바빠 수리도 받지 못하고 결국 이 여름을 에어컨 없이 지냈다.
아스팔트 지면이 무르익는 오후되면 창문으로 스며드는 외부의 뜨거운 공기가 선풍기를 통해 더욱 강력한 바람을 뿜어냈다.


가을바람이 부는 이렇게 청명한 날씨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더 괴로울까 봐 이렇게 정신까지 혼미해지는 유래 없는 더위를 여름 내내 주신건가 싶다.

날씨는 하루사이에 손바닥을 뒤집듯 간단하게 여름을 물리쳤다.
도저히 꺾일 것 같지 않던 날씨가 하룻밤, 반나절의 비와 함께 언제 거기에 있었냐는 듯이 어떤 저항도 소리도없이 가볍게 떠나갔다.

기분 좋은 시원한 바람이 정신을 깨우고 머릿속을 가라앉힌다.
어느새 높아진 하늘과 그냥 아름답다고 표현하기엔 미안한 파란 하늘이 눈부시게 빛난다.
기온이 내려가니 좁아진 기도 때문에 숨을 쉬지 못하는 천식환자에게 기관지 확장제의 한번의 펌핑이 선사하는 숨쉬는 자유처럼 이 상쾌한 가을 날씨는 알러지성 천식환자인 나에게는 닫혔던 기도가 열리는 느낌으로 설명이 되었다.




한비와 도서관에서 빌린 dvd를 보았다. "lost christmas"라는  영화였다. 올해 초에도 한번 빌린 적이 있었는데 한비는 보고 싶은데 시우가 보기 싫다 해서 못 봤던 영화라고 해서 빌려왔다.


일 년 전 크리스마스에 엄마아빠를 사고로 읽은 구스라는 주인공 소년이 사고 날 부모님께 받은 강아지를 잃어버리고 그 개를 찾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찾아주게 된다. 결국엔 주인공도 그날로 돌아가서 잃어버린 부모님을 다시 찾는 내용이다. 다 보고 나서 영화케이스를 보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동화 같은 영화라는 글이 적혀있다.
우리도 구스처럼 그날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수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시우가 보지 않겠다고 한 영화는 결국 나와 한비가 보게 된 것이다. 시우는 엄마와 한비가 이걸 같이 보게 해 주려고 그때 보지 않았던 걸까. 시우와 한비는 늘 둘이 함께 영화를 보고 나와 남편은 아이들과 따로 영화를 보았다.  함께 아이들이 고른 영화를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이번엔 한비가 혼자서 보는 게 심심해 보여서 나도 같이 보게 된 것이다. 아무런 내용도 모르고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이 우연 같지 않았다. 한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는 엄마를 보면서 이 영화를 다시 고른 것을 후회하지 않았을까... 한비가 오빠를 기억하는 어떤 행위들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기를 바라.

정말 영화처럼 모든 걸 깨닫고 다시 잠에서 깨었을 때...다시 그날로 돌아간다면...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면... 우리가 지금 넷이라면...

넷이라는 조합이 그렇게 완벽한지 미처 몰랐다. 우리가 넷일 때 느꼈던 그 충만함과 단단함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우리가 다시 행복이란 걸 찾을 수 있을까...
셋은 많이 외롭고 쓸쓸하며 허전하고 부족하다...



2016년 사고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당시 2년간 기록했던 이야기들을 편집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아들의 기일이 8주기가 되었습니다. 이 글을 써내려 갔던 피투성이였던 나는 시간이 처방하는 어느 정도의 망각을 통해 상흔을 남길지언정 흘리던 피는 서서히 멈추고 상처는 단단해진 채 상실의 아픔도 나의 일부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에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나도 그랬다고 지금도 이렇다고 말을 건네고 손을 잡고 위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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