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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미영 Dec 19. 2022

사고는 언제나 예기치 않게 일어난다.


아직도 그날의 그 순간들이, 그 상황들이 생생히 기억난다.


2022년 3월 24일

오후 2시반 정도쯤이었을까, 새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근무중이었고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급한일이거나 중요한 일이면 메시지를 보내거나 다시 연락하겠지 하고 있었다.


그렇게 근무를 계속 하던 중 무언가 쎄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3시반쯤 새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새언니의 첫 마디는..

"아버님 전화 받았제?"

라는 말이었다.


'어? 아빠가 나한테? 무슨일로?'

라는 생각이 그 짧은 몇 초사이에 스치며 무언가 잘 못 되었다는 느낌이 훅 하고 들어왔다.

아빠가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고?

그럴일이 거의 없는데...

나에게 연락 할 일이 있으면 항상 엄마랑 통화 중일 때 말을 전달 하거나 넘겨 받으셨었다.

엄마도 아니고 아빠가 전화를 했다니...


"아니, 아무 연락 없으셨는데, 왜?"

라는 나의 말에 새언니의 대답은 너무도 황급했고, 무언가 큰 일이 벌어졌음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어머님이 크게 다치셔서 지금 119로 이송 중이란다. 오빠도 울산에서 출발 했으니까 빨리 아버님 한테 전화 해봐"


울산에서 살고 있는 오빠가 대구까지 지금 바로 오고 있는 중이라면 분명 작은 일은 아닐 것이다.

어떤 상황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아빠에게 바로 전화를 드렸다.


"아부지~ 무슨일이예요?"


"엄마가 산에서 떨어져서 119타고 지금 대구로 가고 있단다. 아빠 보다는 니가 더 빠를 것 같은데, 병원으로 갈 수 있겠나?"


"어느 병원으로 갔는데요? "


"여기 영천에서는 진료 안 된다고 해서 대구로 갔는데 oo병원에서 진료 안 된다고 ㅁㅁ병원으로 지금 다시 가고 있단다."


"4시에 퇴근하니까 일단 내가 바로 가보께요"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부모님은 경북 영천에 거주중이시다.

그 곳에도 대학병원 지역부설 병원이 있다.

그 곳에서 일단 진료가 안 된다고 하여 대구로 이송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동중 가장 가까운 대구의 상급 종합병원으로 가려 했으나 그 곳에서도 진료가 안 되어 대구에서 제일 유명한 대학병원으로 오고 있다고 했다.


다행히 내가 근무중인 곳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15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당시 1주일 로테이션 근무 중이었는데 그 주는 내가 4시에 퇴근하는 날이었다.

퇴근까지 30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긴 시간이었던가

어디를 어떻게 다치셨는지, 어떤 상황인지 전혀 알 수도 없이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이라면 정말 근처도 가기 싫은 나인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4시 땡! 하는 순간 바로 사무실에서 뛰쳐 나갔다.

그리고 병원을 향해 달렸다.

병원에 거의 다 도착 할 때쯤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주민등록번호를 알고 있냐는 거다.

환자 인적사항을 알아야 환자 등록을 한다는 거다.


나는 엄마 주민등록번호는 기억하지 못 한다.

그래서 오빠에게 연락을 했더니 구급대원에게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 멀리 코너만 돌면 바로 병원 응급실이다.

병원 응급실이 보이던 그때 병원에서 나오는 '영천119'라고 스티커가 붙어진 구급차가 병원을 빠져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응급실 앞에서 환자 이름을 말하고 출입증을 받고 안내 받은 곳은

대구권역 응급의료센터 응급실 외상소생구역 이었다.


일반 응급실이 아닌 외상환자들을 치료하는 외상응급실이었고

그중에서도 외상소생구역 이었다.



그리고 내 시야에 들어 온 엄마의 모습을 보자 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그렇다고 주저 앉아 울 수도 없게 수 많은 서류에 사인을 하라며 나에게 내밀었다.


가장 급한 것이 수혈이었다.

엄마 혈액형을 확인하고 수혈 동의 사인을 했다.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출혈이 심해 긴급으로 흉관삽입으로 피를 빼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엄마의 비명소리.

얼마나 아프실까.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래도 소리 내어 울수도 주저 앉을 겨를이 없다.


엄마가 평소 지병은 없으신지, 드시는 약은 없으신지, 평소 건강 상태는 어떠 하셨는지..

같은 질문에 대해 몇 번을 대답했을까.

그만큼 엄마가 다치신 곳이 많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응급실에도 보호자는 한 명 밖에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사실, 나는 병원에 가면 공황증상이 온다.

속이 울렁거리고 현기증이 나고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다른 어떠한 병원에서는 괜찮은데 유일하게 엄마가 있던 그 병원만 가면 그런 증상이 있다.

그곳에서 내가 2번이나 수술을 하고, 4차례의 시술을 했음에도 재수술이 필요하다는 판정을 받은 그 이후 부터 였던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버텨야 했다.

고통에 힘겹게 버티고 있는 엄마를 위해 내가 쓰러질 수 없었다.


엄마가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걸까.

사고가 있기 몇 일 전, 엄마와 통화를 하는데 그런말을 하셨었다.


"엄마가 혹시 다치거나 아프거나 하면 니네 아빠가 엄마 뒷바리 할 수 있겠나?"

라고 말이다.


부모님은 평생 농장을 해 오셨는데, 두 분이서 각자 맡은 파트가 전혀 다르다.

엄마는 아빠 영역까지 커버가 되지만, 엄마 영역은 아빠는 전혀 아무것도 모르신다.

그리고 아빠는 은행에서 손수 인출 한 번 해보지 않으 신 분이다.

그러니 집안일 역시 해 본적 없으신 분이다.

아니, 하지 않으신 분이다.


아빠가 못 미다워 엄마가 잔소리 하기 싫어 그냥 해버리는 스타일이라고 할까.

그리고 엄마가 워낙 잘 하시니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그렇게 힘겹게 5시간을 응급처치와 각종 검사를 한 후 의식없이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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