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팅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예정 시간보다 5분 빨리 출발하면 30분 빠르게, 5분 늦게 출발하면 30분 늦어버리는 희한한 ‘경기도 타임’ 덕분에 잠시 여유가 생겼다. 가장 가까운 카페에 가, 커피를 시키고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택시에서 밤새 업데이트된 여기저기 이야기들은 다 봤고, 책도 안챙기는 바람에 가만히 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때 카페에서 패닉의 ‘눈 녹듯’이 흘러나왔고 거의 스무 해 정도 전 어느 겨울에 도착했다. 응답하라 1997에서 정은지가 HOT 노래를 부르며 옛날로 돌아간 것처럼 ‘그 밤 눈이 펑펑 왔지’라는 노랫말과 함께.
스물한 살, 대학교 2학년이 끝나가는 겨울이었다.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고, 그 해 가을쯤 시작한 연애는 싸이월드의 한 챕터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패닉의 새 앨범이 나왔다. 정류장도 좋았고 로시난테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눈 녹듯’을 가장 좋아했다. 별게 다 별일이던 시절에 눈 녹듯 사라지는 마음이 내 마음에 걸려서는 아니고 동아리 엠티갔다가 집에 오는 길에 진짜 눈이 펑펑 왔고, 나는 이 노래를 들었고, 숙취에 한참을 자고 일어났더니 눈이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그때의 온도, 습도, 분위기, 날씨가… 어쨌거나 그렇게 그 시절의 BGM은 '눈 녹듯'이었다. 밖을 나갈 때도, 집에 와서 노래를 틀 때도 첫 곡을 차지했다.(알고리즘 혜택 따위 없던 때, 좋아하는 노래들로만 가득 찬 작은 엠피쓰리에서 첫 곡을 차지하는 건 그야말로 인생곡이라는 거지) 눈이라도 오는 날엔 무한 반복해서 들었고, 술에 취한 버스 안에선 노래 속 주인공이 되어 훌쩍였을지도 모른다. 흑흑 그리 아름다웠던 내 사랑이 눈 녹듯 사라진다니… 풉
그래서 이 노래를 들으면 그 겨울의 사소한 장면들이 소환된다. 추웠던 명동거리나, 첫차를 기다리던 과실, 눈이 펑펑 오던 날 학교 후문 술집, 오들오들 떨며 나눴던 이야기와 감정들, 우리 함께 한 일도 마치 없던 것처럼 사라져버린 사람들까지 다 방금 내린 눈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대체로 서툴고 촌스러운 것투성이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 절대로 돌아갈 수 없어서 그저 그리움일 수밖에 없는 것들. 그런 적 없는데 처음으로 먹먹한 느낌이 드는 4분이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적은 삼전과 비트코인을 사지 않은 내가 바보같이 느껴질 때 말곤 없었는데 이날은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아니 정확히 그때의 내가 아니라 그때의 내가 있는 곳으로 가서 어린 나를 한번 안아주고 싶었다. 아 늙어버린 건가…
한 잔의 맥주엔 오늘 하루가 담긴다. 한 편의 영화엔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다. 그리고 4분 남짓한 한 곡의 노래엔 한 계절이 담긴다. 그 계절에 우리가 나눈 사랑과 이별, 이제 보면 별거 아니지만 당시엔 매우 심각했던 고민과 방황 대책 없이 뜨겁고 연약했던 마음들과 함께 꼭 안아주고 싶은 그때의 내가 된다. 조금 슬프지만 그런 노래와 계절이 있어 또 다행이다.
요즘 차만 타면 우리는 공주송을 듣고, 모아나 노래를 듣고, 티니핑송을 듣는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말랑핑 송을 마주하게 되면 2024년의 아주 추웠던 요즘을 떠올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