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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 Oct 12. 2022

000. 딸깍. 치익. 꼴깍.

맥주는 술이 아니야. 인생을 적셔줄 뿐이야.

모두가 그러하듯 출근할 때부터 아니 어젯밤 출근을 위해 침대에 누웠을 때부터 아니 일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누구나 그러하듯 느리게 흐르는 시계에 애가 탔고, 쓸데없이 내뱉어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말라비틀어갔다. 진짜로 바스라지기 전에 집에 가고 싶었다. 정신을 빼앗기면 안돼. 정신을 빼앗기는 순간 야근하는 수가 생기니까. 정신을 차리고 퇴근 이후를 생각한다. 곱창 트럭이 오는 날이니까 가는 길에 곱창만 2인분을 사야지.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냉장고를 열어 맥주 한 캔을 꺼내 호다닥 마시고 곱창이 더 식기 전에 샤워를 끝내야지. 유니콘 7화를 틀어놓고, 새로운 맥주를 꺼내 마셔야지. 아니 두 캔 아니 남은 세 캔을 다 먹고. 이 생활을 청산해야지. 내일부턴 안 그럴 거니까. 맥주를 다 마셔치워야지. 완벽에 가까운 저녁 계획과 함께 딸깍. 치익. 꼴깍. 딸깍. 치익. 꼴깍. 주문과도 같은 이 리듬에 맞춰 온 몸을 집에 있는 맥주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맞춘다. 종종 이렇게 오늘을 살아내고 버틴다.



길었던 인생이 두 시간 남짓 한 편의 영화가 되고, 깊었던 사랑이 4분짜리 한 곡의 노래가 되는 것처럼 오늘은 맥주 한 캔이 된다. 어떤 날은 "우리 이거 다 마시면 다 잊는 거다"라고 말하며 따끔거리는 목을 감싸고 벌컥벌컥 삼키고. 또 어떤 날은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조금씩 아껴 홀짝인다. 어떤 하루가 됐든 약간의 취기가 오르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좋았던 하루는 날아가지 않을 만큼 무겁게, 그렇지 않았던 하루는 다신 나올 수 없이 저 깊은 곳으로.



누군가의 노래처럼 맥주는 술이 아니다. 인생을 적셔줄 뿐이다. 그렇게 촉촉해진 인생은 나의 하루가 더 이상 메마르지 않게 해 주고, 새로운 마음을 피어나게 해 주고, 누군가를 품을 수 있게 해 준다. 



현재 시간, 4시 22분. 남은 1시간 40분 동안 열심히 주문을 외우자. 딸깍. 치익. 꼴깍. 딸깍. 치익. 꼴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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