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처럼 식어버린 내가 나이듯.
아직 여름이라 불리는 게 더 좋을 거 같은 9월 초. 시원한 안쪽 자리 대신 밖에 앉았다. 덥고 뜨겁지만 지금부터 겨울 전까진 그래야 할 거 같다. 후덥지근함을 온몸으로 맞으며 안주가 나오기 전에 맥주 한잔을 다 비웠다. 맛있다는 말과 함께 또 한잔. 아마도 입에서 느끼는 맛보다 더 큰 맛있음이 있었을 것이다. '진짜 오늘까지만 먹고, 내일부터 갓생산다'는 마음으로 또 한잔. 빠르게 배가 차고 취기가 올랐다. 먹다만 맥주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특별히 새로운 건 없었다. 언젠가 들었던 거 같은 회사 욕과 인스타에서 본 새로운 회사 이야기. 여전히 물려있는 코인과 주식 전과는 사뭇 다른 부동산 이야기. 주식과 코인의 세계에서 물리지 않은 사람은 없는 건가. 아니면 벌었다고 하면 맥주 사라고 할까 봐 쉬쉬하는 건가. 그리고 각종 소개팅과 모두가 아는 전 혹은 전전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와 판에서나 볼 줄 알았던 아는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이건 좀 놀랍고 새로웠다. 이제는 요즘 사람이지 못한 사람들의 요즘 사람들 경험담까지. 천천히 맥주를 마시며 크게 웃다가, 작게 웃다가를 반복하며 적당하지 않게 취한 사람들이 되었고 마침내 '우리. 옛날에.'이야기가 시작됐다. 대부분 같이 술 먹고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때 웃겼던 일은 아직도 웃겼고, 그때 심각했던 일도 지금은 웃겼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술을 마셨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고, 십 년이 지난 일인데도 토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사이 맥주잔에 맺혔던 물방울들은 모두 흘러 사라졌고, 맥주는 미지근해졌다.
누군가는 새로운 맥주를 시켰고, 또 누군가는 얼음을 부탁해 맥주에 넣었다. 그리고 나는 미지근해진 맥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그 맥주가 서른보다 마흔에 가까운 서른,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어정쩡하게 이도 저도 아닌 회사원인 나 같아서. 나쁘지 않은데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아이디어들과 말은 되는데 맛은 없는 카피들이 십 년이 넘는 회사생활의 대부분이다. 선을 그어 딱 잘라 중간 아래 정도 해당되는. 대체로 기타 등등이나 대부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으로 나이를 먹은 아무런 매력이 없는 미지근한 맥주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나는 이 맥주를 버릴 수 없고, 한 모금 삼킬 때마다 이야기한다. 그래. 식 어빠 져도 맥주는 맥주지. 이런 내가 나인 것처럼.
맥주를 마시는 건 늘 즐겁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시간들과 나는 자주 미지근한 맥주 같다. 차가운 맥주보다 매력적이지 못하고 쓸데없고 맛이 없는. 하지만 그보다 더 속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런 맥주도. 이런 맥주같이 미지근한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며. 맥주를 마시자!
(생각해보면 이 맥주는 아주 차가워서 순식간에 한잔 비우고 여름을 채우고, 누군가를 취하게 하는 매력 넘치던 순간이라도 있었는데 내가 뭐라고 측은해하냐. 다음엔 그냥 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