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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 Oct 25. 2023

그럴 수 있는 그럴싸 인간

모두가 어떤 인간이 되려고 노력한다. 아니 어떤 인간인지 분명히 하려고 한다. 그래서 MBTI를 비롯한 수많은 테스트들이 끊임없이 나온다. 여러 번 테스트를 반복하다 보니 내가 정말 이런 사람이었나, 아니면 그냥 이런 사람이고 싶은 건가라는 생각도 들고, 어떤 항목 앞에선 어? 나 뭐였더라?라고 한참을 고민한다. 한없이 가볍고 의미 없는 것에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망설여야 하는 건가. 그러니까 나는 주말에 친구들 만나고 싶을 때도 있고 집에서 쉬고 싶을 때도 있는데, 다가오는 주말에 뭘 할 거냐라는 질문에 뭐라고 답할 건지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 그래서 나를 쉽게 정의할 수 있는 건 큰 장점이다. 누군가를 만날 때도, 사람들과 섞여 사회인으로 행동해야 할 때도, 특히 자소서를 쓸 때도, 넷플릭스에서 볼거리를 고를 때도, 혹은 영철이가 "말 잘해야 돼 지금"이라고 말하며 무언가에 대해 선택을 종용할 때도,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이렇게 짠! 행동하고 말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우물쭈물이 몸에 배어있고 '아... 음... 습...'과 같은 추임새로 말과 행동에 마가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동경의 대상이다.


한때, '취향'이 모든 것의 답이 되던 젊은 시절엔 나도 나 자신에 대해 확신했던 것 같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분명했고 나다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선명했다. 취향을 빌미 삼아 남보다 우월해지려 애썼던 적도 있고, '취존'이라는 말은 폄하를 위한 조금 나이스 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내가 그어놓은 경계들이 무너지고 지워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 너그러워진 건가? 그건 절대 아니다. 여전히 싫은 것과 사람은 죽도록 싫으니까.


무너진 경계들은 세계가 확장되는 과정인 줄 알았는데, 공고했던 나의 세계가 공중으로 사라지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결국 내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이도 저도 아닌, 뜨뜻미지근한. 나쁘진 않은데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대충 그럴싸한 인간 말이다. 언제나 이럴 수도 있고, 또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어서 "너 T야?"라고 물으면 "나 에프인데 근데 티일 때도 있는데 그러나 확신의 에프인데 또 티야" 결국 네버더레스의 반복인.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 갔다. 대체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서 자꾸만 주변 사람들의 생각과 시선을 신경 쓰게 된다. 그리고 좋아서 했던 일들에 갑자기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사람은 결코 하나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또 절대로 정의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어떤 사람일까 끊임없이 묻지만 답은 점점 더 모르겠다. 아니면 이게 인간에 대한 정의인가?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는 그럴싸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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