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고등학교 지리선생님의 추억
(대문사진 출처: 블랙번 머큐어 호텔 홈페이지)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지리 과목을 담당하셨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스승이시기도 한 그 선생님은 S대 지리교육과를 나오신 엘리트셨는데, 자신의 전공에서 실력자이시기도 했지만, 학교생활 중에 뭔가 사건이 생겼을 때 학생들에게 해 주신 말씀은 지금까지 기억날 정도로, 당시에는 파격적이면서도 지혜로 가득한 말씀이었다. 한 남자 교사의 학생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을 때, 너희들은 이제 어린애가 아니고 선생님도 남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셨고, 학생들 소지품 검사에서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땐 불시에 소지품 검사를 하곤 했다.) 담배가 나온 ‘사건’이 발생하자, 담배는 이 담에 너희가 경제력이 있을 때 자기 돈으로 사서 피우라며, 부모님에게서 받은 용돈으로 살 물건은 아니라고 하셨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여자가...’ 또는 ‘학생이...’로 시작하는 답답한 훈시와는 격이 달랐던 것이다. 기분이 내켜야 가끔 좋은 성적을 받곤 하던 ‘간헐적 우등생’이었던 나는, 고등학생 시절에 세상을 30도쯤 삐딱하게 보는 습성이 있었던 탓에 표준화된 학교생활을 하는 것이 좀 버거웠는데, 그 선생님 말씀만 유일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선생님께서도 나를 ‘박사’라는 애칭으로 부르시며 예뻐해 주셨다.
리버풀에 오니 갑자기 그 선생님이 생각났던 것은, 리버풀 FC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로도 유명하긴 하지만, 지리 시간에 배웠던 리버풀에 관한 지식이 자동 재생되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대표적인 산업도시, 영국 제일의 항만도시,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흑인 노예들을 미국으로 실어 나르던 노예무역의 중심지라는 것. 세기의 그룹 비틀스를 잉태한 도시라서, 비틀스 이후엔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관광도시의 면모도 추가되었다.
여행기를 쓴다는 것은 이미 가본 장소를 다시 여행하는 것이다. 조금 더 입체적인 방식으로, 시간의 여행과 공간의 여행뿐 아니라 상상 속의 여행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다. 구글 스트리트 덕분에 한번 방문했던 장소를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볼 수도 있다. 거기에선 내가 가봤던 장소가, 내가 없는 동안 변하고 있는 모습까지 확인할 수 있다.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면 변하지 않아서 반갑고, 변했다면 조금은 섭섭하기도, 또 놀랍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난 여행만큼이나 여행을 기록하는 행위를 즐기는 것 같다. 비틀스가 출연하던 캐번 클럽의 거리를 지도 위에서 되짚어본다. 매튜 스트리트 10번지. 그리고, 한번 가보았기에 낯설지 않은, 마치 여행지에서 스쳐간 사람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갑지만 조금은 어색하게 그 거리와 인사를 나눈다. 귓가엔 현장에서 들었던 토요일 밤 밴드의 연주 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하다. 원래 일정은 일요일 오전에 잡혀 있었는데 센스 만점의 현지 인솔자가 이 거리의 생생한 본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토요일 오후에 일행을 그곳에 내려놓은 것이었다.
동작 빠른 젊은 여행자들은 잠깐 사이 벌써 입장료를 지불하고 클럽 내부까지 들어간 모양이지만, 수줍고 소심한 나는 거리 한쪽 존 레넌의 동상 옆에 엉거주춤 기대어 서서, 밀려오는 주말 저녁의 인파를 낮은 앵글로 잡아 영상에 담았다. 요란한 밴드의 음악에 맞춰 오가는 사람들의 발만 보이는 재밌는 짤이 되었다.
미국 CBS의 심야 토크쇼 ‘더 레이트 쇼 위드 스티븐 콜베어’에서는 1964년 2월에 에드 설리번 쇼에서 펼쳐진 비틀스의 미국 텔레비전 방송 데뷔 무대를 그대로 재현한 듯한 세트에 한국의 방탄소년단을 맞았다. 바로 그 비틀스의 공연이 있었던 같은 장소, 에드 설리번 극장이었다. 방탄소년단을 비틀스에 비유한 것은 영국 BBC 방송이 처음이었는데, 여기서 영감을 얻은 미국인들이 비틀스의 ‘브리티시 인베이젼’을 떠올리며 그 장면을 패러디한 셈이다. 재밌는 것은, 비틀스의 스펠링 BEATLES에서 EA와 LE를 제거하면 BTS가 된다. 무대 뒤편에 놓인 드럼에다 BTS라는 글자를 써넣기 위해, 모션 그래픽을 이용해 그처럼 알파벳 네 개를 제거하니 비틀스가 비티에스로 변했다. 재밌는 상상력이다.
리버풀은 아일랜드 해로 흐르는 머지강을 끼고 있는데 그 강변에는 비틀스 멤버 4명의 청동 입상이 서 있다. 캐번 클럽에서 리버풀시에 기증을 한, 앤드류 애드워즈의 작품이라고 한다. 동상을 마주 보며 왼편 후경으로는 리버풀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로열 리버 빌딩이 위풍당당하다. 1911년에 완공된 이 빌딩의 꼭대기에는 두 개의 쌍둥이 시계탑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데, 그 시계탑 위에는 리버풀의 전설적인 새가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가마우지와 독수리의 사촌지간쯤 되는, 리버 버드라 불리는 이 새들이 날아가는 날, 도시는 종말을 맞게 될 것이라고 한다. 말이 안 되는 것이 전설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조각상으로 만들어 놓은 새가 날아갈 리는 없으니 도시의 종말이 오는 날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T 성향을 확인한다. 우리도 한강변에 BTS의 동상을 세우면 관광산업이 더욱 호황을 누리게 되리라는 생각도 해 본다. 안 그래도 그 청년들이 콘서트를 여는 곳마다 관광객의 숫자가 늘어 호황을 맞는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으니 새삼 참 대단한 청년들이란 생각이 든다.
월드 스타의 비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요절은 그를 레전드로 만든다. 그것이 존 레넌의 경우인데,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한 인간의 삶이란,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수많은 모순들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부모에게서 버림받았으면서 전처의 아들에 소홀히 하고, 일생일대의 영혼의 짝이라고 했던 오노요코를 배신한다. 예술가로서 훌륭했지만, 인간적으로는 심히 불안정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정신질환자에게 살해당한 그의 어이없는 죽음은, 도대체 산다는 건 무엇일까 생각하게 한다.
하룻밤 묵어가게 될 블랙번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니 비틀스의 흘러간 노래들을 틀어준다. 아는 노래가 나오면 속으로 흥얼흥얼 따라 부르는 소리도 들려왔다.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은 일이긴 하지만, 혹시 다음에 리버풀에 올 기회가 생긴다면 그 유명한 노란 택시를 타고 비틀스 관광을 제대로 해 보겠다는 생각도 했다.
한참을 달려, 얼핏 보아도 역사가 오래된 건물 앞에 당도했는데, 700년 전 중세 때 지은 건물에 호텔이 들어서 있었다. 천장 높은 리셉션 홀에서 식사를 했는데, 역시 한국 사람들은 빠르게 음식을 먹어버리는 것을 선호하지, 옆 사람과 스몰 토크를 즐기지는 못한다. 처음 만난 낯선 사람과의 대화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세대 간에도, 남녀 간에도, 자연스러운 대화를 하는 훈련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동갑내기인데도 빠른 생일, 늦은 생일을 따지니,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과 대화를 불편해하고, 남녀 칠 세 부동석의 개념이 여전히 남아 있는지, '외간 남자', '외간 여자'와 스스럼없이 말을 섞는 것을 색안경 끼고 보는 시선도 있다. 외국에서 오래 지내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이렇게 말하면 외국물 먹은 티 낸다고 뒷담화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여행이 시작된 지 아직 이틀밖에 되지 않았으니 서로 낯을 좀 익히게 되면 나아지겠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