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느 지인이 내게 말했다. 꾸미지 않은, 있는 나를 드러내서였다. 그것이 그를 조금 당황스럽게 했나 보다. 나이가 들면 둥글둥글해진다는데 나는 거꾸로 모서리가 있는 어떤 모양을 띠어갔다.
둥글둥글하다는 것이 과연 정말 둥글둥글해진 것인지 의문을 던진다. 세파에 찍혀 눌린 것인지 정말 스스로 다듬어 둥그레진 것인지.
반짝반짝 빛나던 보석 같은 사람이 어느 날 보니 둥글둥글 광채 없는 돌멩이가 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유별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멋있는 것이었다. 부러움과 질투에 유별나다고 못난 생각을 했다.
그는 보기엔 둥글둥글해졌지만 어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어른이 되지 못했다. 자신의 색을 드러내기를 포기한 것일 뿐. 하지만 다시 어른이 될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누군들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스스로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내가 누구인지 규정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를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과 의외성 모두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감정과 감각의 반응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하나씩 벗겨내 가면서 나를 발견한다. 때문에 되도록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바로 나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어떠한 지식을 대입하든 경험과 반응만큼 확실한 팩트를 제시해 주지는 못한다.
악마라는 소리를 들어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그만큼 나는 자애주의자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 착한 사람, 부담없는 사람이라는 칭찬보다 악마라는 것이 내게는 칭찬으로 들렸다. 모자란 나를 그대로 보여 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악마로 불리기 위해 나는 겹겹이 싸인 양파 껍질 같은 나의 속을 파헤쳤고, 그 속에 웅크리고 숨어있던 존재를 마주했다.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두 손 들고 인정했다.
- 그래, 난 정말 철저히 이기적인 인간이었어.
2.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의 예상대로 반응하지 않거나 자기 마음처럼 통제하기 힘들다고 느낄 때 그의 탓을 한다. 자식이건, 부모건, 동료건, 친구건, 연인이건, 심지어 모르는 사람이건. 그러면서 또 말로는 자신 때문에 변하는 건 원치 않는다고 한다. 대체 이 모순은 무엇인가. 찌질함 끝의 발 수습 같다. 머리와 마음이 늘 이렇게 상충한다.
어른이 되려면 자신이 예민하게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예민한 부분은 자신의 몫이다. 누군가 자신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다고 화를 내는 건 어리광이다. 어리광 부리는 맛에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여리고 예민하고 감수성이 짙은 것이 선(善)은 아니다. 그것을 의무적으로 알아봐 주지 않는다고 악(惡)이 되는 것도 아니다. 배려를 부탁하는 것은 스페셜 오더와 같다. 권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갑질이 되는 것이다.
무언가에 예민한 것은 약점이다. 스스로가 그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경험을 통해 얻은 부정적 느낌. 트라우마 같은 것들. 물론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 가해자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과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 반드시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닌 사람을 가해자로 설정하는 것은 어떤가? 자신이 상처 입었다고 생각한 것을 그와 아무 관련 없는 상대에게 왜 미처 몰라주었냐고 비난할 수는 없다.
자신만 아는 상처. 아무도 그것이 상처일 줄 모를 수 있는 그런 것들. 부연의 가해자를 끝없이 자가 창출하는 상처들. 그로 인해서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하는 상처들. 본질은 자기 연민과 우울에 있지 않다. 그 상처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
어른이 되는 것은 계속해서 자신을 옷 뒤집듯 뒤집어 꼼꼼히 살펴보고 털어내는 일을 반복하는 과정이다. 귀찮고 때론 더럽고 역겹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구역질을 하더라도 반드시 거쳐내야 한다. 그것이 두 번 다시 자신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지 않게 하는 유일한 처방이다. 그래서 가끔은 악마 같다는 소리도 즐겁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어른이 되는 일은 만만하지 않다. 죽기 전까지 평생을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