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추억이 선물한 감동
2021년 8월 4일 2020 도쿄 올림픽 여자배구 8강전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튀르키예를 3-2로 꺾고 4강 진출을 확정하는 순간 MBC 객원해설위원 황연주(현대건설)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이미 조별 리그 도미니카 전에서도 주장 김연경의 ‘해보자!’는 독려에 눈물샘을 쏟은 전력이 있은터라 황연주는 올림픽 이후로도 한동안 ‘눈물의 여왕’으로 불렸다. 주포이자 대한민국 여자배구 그 자체인 김연경의 공격 성공으로 승부가 결정되었다는 점은 경기의 극적 요소를 한층 더해주었다.
https://youtube.com/watch?v=JycOm-C_xkQ&feature=share
https://youtube.com/watch?v=qhmQaWEG588&feature=share
하지만 황연주는 단지 해설 중의 눈물로만 기억되기엔 너무도 대단한 커리어를 자랑하는 여자배구의 ‘리빙 레전드’이다. 황연주와 김연경은 V-리그 초창기 흥국생명에서 뛰며 4번의 시즌 중 3번의 우승을 합작한 ‘원투펀치’였다. 2009년 김연경은 해외 리그로 진출했고 황연주도 2011년 FA(자유계약)가 되어 현대건설로 이적하며 다른 길을 가게 되었고, 김연경은 튀르키예에서 황연주는 국내에서 몇 차례 우승하며 전성기를 이어갔다. 흥국생명에서는 헤어졌지만 두 선수는 국가대표에서 10여년을 함께 했다. 도쿄올림픽의 여파로 또 시간이 좀 지난 관계로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여자배구가 4강에 올랐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는 사람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2012년 대표팀은 여자배구 사상 최강의 드림팀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당시 20대 중반으로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던 두 선수는 ‘당연히’ 대표팀의 일원으로 영광을 함께 했다
https://youtube.com/watch?v=TD17H6Hob3k&feature=share
캐스터 허일후의 언급대로 김연경은 황연주가 중학교 때부터 봐온 후배이며 동료이자 인생의 오랜 친구이다. 지난날 ‘막내 라인’으로 함께 했던 김연경이 어느덧 큰언니가 되어 후배들을 다독이고 혼신의 힘을 다해 뛰는 모습을 보며 황연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숙소에서 함께 먹고 자고 훈련하며 고생하던 시절에서부터 리그 정상에 서고 대표팀에서 4강에 올랐던 순간 그리고 잠시나마 상대팀으로 마주했던 상황에 이르기까지, 오만가지 상념이 다 떠오르고 모든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김연경의 독려와 외침에서 황연주는 힘들었지만 찬란했던 지난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말로 표현 못할 감격에 겨워 울컥했다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그 시간을 보내는 유형은 천차만별이다. 누군가는 마치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절절히 충실하게 삶에 임하지만 그저 무심하게 심지어 의미없이 흘려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황연주는 배구선수로서 성인무대에 데뷔한 이래 소속팀과 국가대표팀을 오가며 누구보다 많은 땀을 흘렸고 영광과 좌절의 순간을 몸소 경험했다. 황연주의 눈물은 그토록 찬란한 시절을 온몸으로 부딪쳐 경험해 본 자만이 흘릴 수 있는 추억과 경험의 결정체였다.
경기를 지켜보며 그리고 해설을 들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겐 과연 그토록 힘들었지만 찬란했던 날들이 있었을까? 인생의 소중한 순간을 함께했던 절친한 동료가 있는가? 내 뒤를 이어 영광을 선물해 줄 후배 혹은 자손이 있는가? 지금 그렇지 않은 것은 물론 장차 그렇게 될 거라고 선뜻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 황연주가 참 대단하고 행복해 보였으며 부러웠다. 한 업계에서 정상에 올라본 경험이 있으며 찬란한 과거를 떠올리며 행복할 수 있는 추억이 있어서 또한 그 추억을 공유할 소중한 사람이 있어서~~
올림픽의 후광을 등에 업고 여자배구는 국내에서도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마침 코로나 사태도 끝을 향하고 있고 경기장마다 명승부를 보기 위해 몰려든 팬들로 관중석은 가득찼다. 국가대표를 비롯한 각 팀의 선수들의 훌륭한 기량과 팬 서비스로 경기의 재미와 수준이 크게 상승했다. 개인적으로 여러 경기를 직관했지만 앞자리에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을 정도로 열기가 대단하다.
리그에서 최고참급이 된 황연주와 김연경도 여전히 현역으로 활약하며 멋진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다. 2년만에 다시 국내로 돌아온 (빠른)1988년생 김연경은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리그 MVP를 수상하며 소속팀 흥국생명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도로공사의 기적같은 우승에 들러리가 된 점은 아쉽지만). 1986년생 황연주는 웜업존에서 대기하다가도 팀(현대건설)이 필요로 하는 순간엔 언제나 등판해 확실히 제 몫을 하고 있다. 외국인선수 야스민이 빠져있는 동안엔 주전으로 활약하며 다시금 강제 전성기를 맞기도 했다.
다음 시즌에도 이들은 소속팀과 동행을 이어간다. 그리고 흥국생명과 현대건설은 여전히 우승후보로 꼽힌다. 함께했던 날들 상대를 응원했던 순간을 뒤로 하고 이들은 냉정하지만 멋진 승부를 위해 또 달릴 것이다. 이들의 여정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고 감격적인 해피엔딩의 순간도 오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배구팬으로서 이들의 플레이를 아직도 볼 수 있음에 너무 다행이고 감사할 따름이다. 가을이 돌아오면 전설은 잘 굴러가고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러 또 체육관으로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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