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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용호 Aug 10. 2019

21. 혼자 견디는 밤.

11월 10일, 여덟째 날

 내 몸은 얼어버렸다. 11월의 추운 날씨 때문이 아닌 공포라는 감정이 나를 얼렸다. 봉고차의 붉은 등에 최면상태로 빠진 듯 멍하니 바라봤다. 대자연속에 이질적인 자동차 엔진 소리가 내 심장을 요동쳤다. 귀에서 들리지 않는 비명소리가 머릿속에 메아리로 울렸다. 폰을 꺼냈다. 전파가 안 잡혔다. 구원의 손길은 없었다. 스스로를 구제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도망쳐야 할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봉고차는 엔진 소리와 함께 움직였다. 앞쪽에 넓은 터라도 하나 있었는지 그곳에서 차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 봉고차는 내게 다가왔다. 이제 보니 봉고차 왼쪽 라이트가 고장 나 있었다. 좀 낡은 차였다. 봉고차는 내 옆을 지나쳐 갔다. 갑자기 차에 문이 열리고 두 세 사람의 손길이 튀어나올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봉고차는 그대로 천천히 하산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산속은 다시 잠잠해졌다. 기묘하도다. 이것이 낮과 밤의 차이일까? 낮이었다면 아무렇지도 않을 상황이 밤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심장을 조여 오다니. 세상의 빛과 어둠을 구별할 수 없는 장님들은 이 차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 방금 격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데 말이다.



 다시 길을 이어갔다. 피곤했던 내 몸에 타의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었다. 좀 급한 발걸음질을 했다. 선약이 생긴 건 아니다. 단지 빨리 하산하고 싶었다.


 여전히 오르막길은 유지됐다. 아까 봉고차가 차를 돌렸던 곳을 지나쳤다. 넓은 터라고 생각했던 곳은 세 갈래길 중 샛길로 빠지는 곳이었다. 주변에 들리는 소리는 신발에 갈리는 돌멩이들의 포효뿐이었다. 그러다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걸음을 멈추고 그 소리에 집중했다. 점점 커지는 소리. 점점 다가오는 기척. 익숙하지만 이곳과는 이질적인 소리. 그렇다. 또 자동차 소리였다. 이 시간에 자동차가 한 대 더 올 줄이야. 아까 다녀간 봉고차는 길을 잘 못 들어서 다시 내려갔다 쳐도 이번에 오는 차는 도대체 왜 이 길로 오는 걸까? 뒤를 돌아봤다. 차가 어디쯤에 있는지 확인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자동차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라이트가 하나만 켜져 있었다. 생각해보니 아까 그 봉고차도 왼쪽 라이트가 고장 나 오른쪽만 켜져 있었는데.



 아.



 그 봉고차다.



 일단 뛰었다. 아무 계획도 없이 내 몸이 반응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봉고차 안을 상상할 여유조차 없었다. 단지 이것은 도망치기다. 이대로 길을 따라간다면 봉고차에게 따라 잡힐지도 모른다. 아까 봤던 샛길이 생각났다. 다시 뒤돌아 이정표도 없는 그 샛길로 들어섰다. 혹시나 발을 헛디딜 까 봐 발의 보복을 줄였다. 그 길의 끝에 마을 하나가 있었다.



 마을 사이로 십자가가 달린 건물이 보였다. 교회였다. 하지만 멀리 있어 가장 가까운 집 담벼락 사이로 숨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저 봉고차가 사라지길. 나라는 존재를 잊어 주길. 여기서 한 시간 정도 숨어있으면 될 거 같았다.


배낭에서 초코파이 박스를 꺼냈다. 남은 초코파이가 하나뿐이었다. 안개 때문에 바닥은 젖어 있었다. 빈 초코파이 박스를 깔고 털썩 앉았다. 웃음이 나왔다. 이 여행이 사서 고생한다는 건 알았지만 목숨을 건 여행이 될 줄이야. 버라이어티 한 밤이구나. 아까는 들개 무리에게 쫓기고 이제는 사람한테 쫓기는 신세라니. 다시 생각해보니 화가 났다.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나한테 들 이러는 걸까. 나는 단지 걷고 싶은을 뿐인데. 안 되겠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봉고차를 다시 만난다면 뭐라고 따져야지.


 순간 땅을 발로 긋는 소리가 섬세하게 들렸다. 나는 놀라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멈췄다. 심장소리 때문에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깨달았다. 방금 땅을 발로 긋는 소리는 화난 내가 발에 힘을 줘서 낸 소리라는 걸. 역시 나다. 아이고 이 미련한 것아.



 1시간 넘게 지났다. 이젠 추워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마음의 평정심이 생기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아까 봉고차가 정말 선한 사람이고 반복된 실수로 길을 번복해서 다시 온 게 아닐까. 만약에 그렇다면 산속에 불도 없이 어둠과 같이 걷는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어쩌면 봉고차가 나보다 더 무서워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내가 하산할 때까지 봉고차는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도로를 만났다. 하지만 너무 외진 곳이라 가로등 하나 없었다. 뭐 크게 상관은 없었다. 이제 어둠에 익숙해졌으니까. 중간마다 정자가 하나둘씩 보였다. 이제 좀 쉴까 생각도 했지만 조금만 더 간 다음에 쉬려고 참고 참았다. 그러다 저 멀리에서 가로등 불빛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저기서 쉬자. 쉬는데 불빛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


 쉰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감정 하나로 쌓여 있던 피로가 무너졌다. 쉬면서 무엇을 먹을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먹었던 초코파이 하나가 전부였는데. 그냥 물로 배를 채우기로 했다.


 불빛만이 보이던 가로등은 이제 주변까지 보였다. 쉬는 동안 눈이 심심하지 않게 현수막이 쳐져 있었고 그 아래 편히 누울 수 있는 큰 정자가 보였다. 그런데 무언가 도로 정 가운데 있었다. 하얀 것이었다. 점점 가까워지자 좀 큰 형체였다. 조금씩 움직이는 거 같았다. 마치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가 앉아있는 거 같았다. 귀신을 믿지 않지만 처녀귀신 같이 보였다. 도로 정 가운데에 말이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아, 제발...... 저건 또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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