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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N의 36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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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용호 Feb 28. 2020

참된 노숙.

 스무 살에 난 낭만과 여유를 몰랐다. 낮에는 콜센터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대학을 다녔다. 주말에는 빵집 알바를 했다. 대부분의 끼니는 걷거나 뛰면서 때웠고 버스나 지하철에 앉으면 쪽 잠을 자는 게 일수였다. 무언가를 위한 목적은 없었다. 그저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 해 뜰 날이 오겠지. 보이지 않는 그 날이 온다면 비로소 난 웃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날도 같았다. 알바를 마치고 밀린 과제 때문에 집으로 허겁지겁 뛰어가고 있었다. 지하철 역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허름하고 꾀 지지한 패딩을 입은 사람들. 무료급식소에 줄 서 있는 노숙자들이었다. 그들 중 맨 앞에 있던 남자가 식판에 음식을 받아 공원 테이블에 앉았다. 그는 숟가락으로 뜨끈한 연기를 뿜는 된장국을 펐다. 후후 불어 그대로 입 속에 넣었다. 그러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행복해 보였다. 그의 미소가 부러워 한참 동안 바라봤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저 남자는 어떻게 웃을 수 있을까. 나도 저 남자처럼 행복해지고 싶었다. 노숙자가 되면 나도 웃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자리에서 모든 걸 버리기로 했다. 일이며 학업이며 불행과 고통을 무소유로 만들자. 집을 뒤로하고 동네를 서성였다. 근처 슈퍼에서 버린 박스 2개를 챙겨 개천 다리 밑으로 갔다. 그곳에는 차디찬 바람이 불고 듬성듬성 지나가는 차 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 자자.’


 박스 2개로 몸과 다리에 하나씩 넣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올 줄 알았는데 추위가 왔다. 이러다 얼어 죽을 거 같았다. 심지어 허기까지 졌다. 집에 가고 싶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갈 순 없어 똥고집으로 아침까지 버텼다. 눈부신 태양이 내 몸을 내리쬈다. 언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바쁜 일정으로 가득 찬 하루를 잠으로 바꿨다.


 다음 날이 되자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사실 변한 건 없었다. 내가 세상을 보는 시선이 바뀌었을 뿐이다. 내 삶에 감격할 줄 아는 안목을.


 수년이 지났지만 나는 가끔 노숙을 할 때가 있다. 나의 노력과 열정이 담긴 내 삶에 불만이 생기면 어김없이 양손에 박스를 쥔다. 매 순간에 감사함을 느끼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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