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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N의 36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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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용호 Feb 27. 2020

고량주.

 그 친구를 만난 건 호주 어느 한 시골 마을에서였다. 그 당시 나는 고기공장에서 도축 일을 하고 있었다. 땀에 젖어 무거워진 그림자를 끌고 셰어하우스에 도착했을 때 처음 보는 대만인이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네모난 안경을 쓴 그는 나를 보더니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양쪽 입꼬리를 올린 그의 이빨은 하얗지도, 노랗지도 않았다. 빛나지도 않게 검했다. 그 미소는 내게 어두운 인상을 주었다.

 

 같이 사는 대만 친구에게 물어봤다. 누구냐고. 저 검은 이빨의 이름은 ‘락(Rock)’이었다. 호주에 온 지 1달이 되어가는데 아직 일을 구하지 못하고 수중에 있던 돈도 떨어져 자기가 밥을 줬다고 했다. 우리의 대화를 듣던 락은 내게 “니하오!”라고 인사했다. 나는 한국사람인데. 심지어 우리는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락을 그리 반갑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락은 그 후로도 매일 우리 집에서 식사를 했다.

 

한 달이 지났다. 난 비자가 만료되어 호주를 떠나게 되었다. 그동안의 보상으로 대만에 여행을 가기로 했다. 호주에서의 마지막 날, 락은 내게 번역기를 들고 말을 걸었다. 내게 남은 식재료를 자기가 다 사겠다고 했다. 그걸 다 사겠다고? 엄청 많은데. 대부분의 한인들이 떠날 때 내게 식재료를 다 주고 떠났었다. 심지어 냉장고와 같은 고가의 물건들도 즐비했다. 하지만 락은 이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돈이 없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서 사려는 게 분명했다. 나는 락에게 번역기를 사용해 말했다.

 

 “너 다 줄게. 돈은 필요 없어. 우린 친구잖아.”

 

 그 말을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진 락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번역기를 사용해 ‘감사합니다.’를 내게 수십 번 말했다.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 도착하고 숙소에서 저녁을 먹던 중 락은 내게 연락을 했다. 지금 어디에 있냐고 주소를 알려 달라고 했다. 호주에 있으면서 왜 주소까지 알고 싶어 할까? 나는 별생각 없이 락에게 주소를 보냈다. 그러더니 락은 자기가 선물을 보냈으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잠시 후, 후줄근한 중년의 남성이 무언가를 양손으로 소중히 품은 채 호텔 로비를 어슬렁거렸다. 보자마자 알았다. 저분은 락의 아버지구나. 나는 락의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락의 아버지는 나를 보자 핸드폰 속에 사진과 동일인물인 걸 확인하고는 양손에 있던 무언가를 내게 줬다. 대만어로 감사하다며 급히 떠났다. 내용물은 고량주였다. 그 고량주는 락의 아버지가 고량주 사업이 망하고 집에 남아있던 몇 안 되는 귀한 물건이었다.

 

 가끔 술집에서 고량주를 보면 그때 생각이 난다. 소주는 써서 못 먹겠는데 고량주는 왜 그리 단지 락에게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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