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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Dec 30. 2023

07 연애편지 쓰는 신입사원

업무메일 작성은 안 가르쳐 주셨잖아요..

입사한 지 서너 달 지났을 무렵..
부장님 한 분이 말씀하시더라고요.
“네 메일은 연애편지 같아서
열기도 전부터 설레.
이번에는 또 얼마나
구구절절할까 싶어서.”


모든 스포츠 경기는 심판이 어떤 형태로든 경기의 시작을 알린다. 그전에 경기를 시작하면 반칙이다. 대화도 마찬가지다. 대화를 시작하자는 확실한 시그널로 상대도 준비가 된 상태애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이라면 밥 굶을 걱정 없이 자란 세대도 ‘식사는 하셨어요?’라는 식으로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입사 초기 나는 업무 메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답답하고 불편한 업무 이야기를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 달려드는 것이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손편지 같은 메일을 썼다. 시작은 흔해빠진 독감의 유행 같은 시의적절한 인사말, 거기에 많이 바쁘다던 일은 잘 지나갔냐는 근황토크는 기본이다. 심지어 최근 만난 적이 있다면, 거기에 관한 에피소드 대방출은 덤이었다.

오히려 매일 마주쳐서 할 말이 없다 싶은 경우에는 다짜고짜 칭찬을 남발했다. ‘오늘 날씨랑 차장님 셔츠가 너무 잘 어울리네요.’, ‘조금 전에 보여주신 데이터는 정리가 너무 깔끔해서 감동받았습니다. 스킬 전수해 주세요.’ 이런 주접을 얼굴 붉히지 않고 떨었던 나날이다. 받은 분들의 표정이 어땠을지는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다 ‘연애편지 쓰는 거니?’하는 부장님의 말씀을 들었고, 나는 민망해 하긴 했지만 무엇이 문제인지도 몰랐다. ‘회사 동료 간에 내가 너무 다정했나?’ 하는 막연한 느낌뿐이었다. 회사 내에서 역할이 크지 않던 시절의 나는 선배님들이 하루에 얼마나 많은 메일을 받는지 몰랐다. 그리고 업무 메일이란 것의 팔 할이 무언가를 요청하기 위해 작성된다는 당연한 사실도, 사내 포털에 접속해서 메일함을 여는 순간 이미 마음의 준비는 끝났다는 것도 몰랐던 것이다.

업무메일의 목적은 상대와의 친밀감을 높이는 것이 아니다. 메일을 받는 동료가 메일의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놓치지 않고 그 업무를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가 업무 메일을 작성하는 목표이고,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결국 내가 못 알아듣자, 부장님은 메일을 더 간단하고 알아보기 쉽게 쓰라고 말씀해 주셨다. 선배님들에게 몇 가지 깔끔하게 정리된 메일을 전달해 주시기를 부탁드렸다. 역시 우는 아이 젖 준다고, 선배님들은 감사하게도 본인의 메일뿐만 아니라 받은 메일 중에도 선별해서 전달해 주셨다. 그렇게 받은 메일들을 보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더불어 내 메일을 받는 사람들이 어떤 느낌을 받기를 원하는가를 생각했다. 그 고민은 꽤나 진지하고 길었다.


그렇게 정해진 내 원칙은 ‘다정하고, 일을 참 깔끔하게 하는 동료라는 느낌을 주는 메일’이었다. 주접은 그만 떨어야겠지만, 연애편지 같은 다정함은 내 개성이니 완전히 지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시각적으로도 한눈에 딱 떨어져야 메일을 읽을 때 기분이 좋을 거라는 가정으로 공문 느낌이 나는 형식을 택하기로 했다.


1. 제목은 반드시 용건이 드러나게 10자 내외로 요약하고, 기한이나 회의 날짜를 반드시 표기!

      - 제목에 용건과 날짜가 있으면, 받는 사람이 메일함만 들락거려도 해당 건을 상기할 수 있다.

2. ‘안녕하십니까. 소속팀(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 OOO 사원입니다.’로 시작!

      - 관등성명 안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아무리 보낸 사람에 보인다 한들 반드시 내용에 써야 한다.

      - 자주 보는 사이라면 이것으로 끝이지만, 오랜만의 연락이라면 약간의 주접은 윤활유다.

3. 본론은 공문의 형식처럼 ‘아래’를 참고하도록 단락을 구분하고, 내용은 넘버링으로 정리!

      - 넘버링으로 목적, 기한(회의 일시), 회신 담당자(참석자), 구체적 요청사항 순으로 정리한다.

        넘버링이 어색한 내용이라면 말머리기호를 사용해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

      - 날짜에는 요일을 포함하면 오타나 날짜를 착각했더라도 더블체크가 된다.

      - 요청기한에 구체적인 시간을 정하면 받는 사람의 업무 우선순위 결정에서 밀려날 확률이 줄어든다.

       - 유관부서, 소속 리더, 비서 등 참조자가 많을 경우 담당자나 회의 참석대상을 명확히 해야 한다.

4. 글자 색깔을 바꾸는 것은 최대한 지양하고, 볼드체와 밑줄로 강조할 것!

      - 여러 색을 사용하면 시각적으로 산만하고, 흑백으로 인쇄 시 구분이 안되거나 오히려 흐려질 수 있다.

5. 본문이 끝나면 ‘이상’ 등의 마침표를 반드시 표시할 것!

      - 받은 사람이 메일 내용을 빠짐없이 확인했는지 확인하게끔 만드는 요소다.

6. 상세한 설명 대신 유첨파일을 아주 친절하고 정성 들여 만들 것!

      - 자료 요청 시 가능하다면 원하는 양식을 주고, 설명도 자세히 달아주는 것이 좋다.

      - 회의 참석 요청이라면 안건이 포함된 타임테이블을 보내주는 것이 사전 준비에 좋다.

      - 특히 엑셀파일은 인쇄에 편리하도록 페이지레이아웃을 설정해서 보내면 센스 있다는 칭찬을 듣는다.

7. 나만의 인사말을 메일 서명(보통 회사별로 명함처럼 정해진 서명이 있다.)에 추가!

      - 자신만의 개성을 표출하되, 업무메일이 공식적인 서신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업무 메일의 목표는 메일을 받는 동료가 메일의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일정을 놓치지 않고 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메일을 잘 쓰는 것만으로도 업무 능력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더불어 사회 초년생이라면 업무 메일이 공적인 서신이며, 문제가 생겼을 때 증빙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전제를 기억하자. 업무에 쫓기다 보면 매번 시간과 공을 들여 메일을 쓸 수 없다. 하지만 메일은 언제나 말보다 무겁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꽤 오랜 시간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정한 원칙대로 두 가지 정도의 기본 틀을 저장해 두고 소속부서와 직급만 바꿔가며 꾸준히 사용했다. 이후로 업무 역량이 높아지고, 경험도 쌓였지만 내 메일의 스타일은 거의 변한 바 없었다. 나에게 원칙이라는 것의 힘은 그렇게 대단해서, 결국 처음에 깊이 고민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원칙 중에서 가장 긴 고민을 차지한 것은 다정한 인사말을 정하는 것이었다. 이 직장을 나가기 전까지는 쭉 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은 문구를 찾고 싶었고, 그 인사말을 보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보낸 메일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했다.

그렇게 탄생한 인사말은 ‘건강한 생각이 머물고, 좋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즐거운 하루 보내십시오.’였다. 공익광고에 나올법한 말이지만, 내 가치관 안에서 정말 행복한 삶을 채우는 하루란 그런 것이기에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정말로 나는 퇴사하는 날까지 그 인사말을 썼다. 마지막 인사도 어제처럼, 마치 내일 또 할 것처럼 마무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건강한 생각이 머물고,
좋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즐거운 하루를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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