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어야 하는 순간
밥 먹어라~~
올해 초까지 하던 일은 유연 근무제였다. 다만 급여정산 업무는 급여일의 날짜에 맞춰야 하기에 주말과 공휴일에 상관없이 업무해야 했다. 작년 9월, 남편 친구 부부 동반 모임에서 식사를 하다가 업무 확인 연락이 와서 조용히 일어나 넷북을 들고 남의 집 책상에서 일한 적도 있다. 마지막 급여를 정산하던 날은 1월 1일 신정이었다. 후임자와 함께해서 시간이 줄었지만.. 일은 피할 수 없었다. 이 업무는 빨간 날과 상관없이 무조건 정해진 날짜에 하셔야 해요. 그래도 다른 날에는 시간을 유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월 1회 정도는 감수할 수 있죠. 좋은 점을 강조하며 인수인계를 진행했다.
내가 기가 막히는 떡국 한 번 끓여줄게. 새해 첫날부터 거실에서 남편이 팔 걷어붙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황금레시피를 찾겠지. 인수인계를 위해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와 업무 하는 방으로 들어가 넷북을 켜고 일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문고리를 잡고 닫으려던 방문을 다시 살짝 열어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줌으로 할 거라 조용히 해줘. 그럼 남편은 알아서 아이에게도 전할 것이다.
자, 됐나요? 어렵지 않죠? 그럼 파일을 보내드릴 테니 두 개로 나눠서 함께 작업해요. 함께 업무를 한 뒤 후임자가 정리한 데이터를 받았다. 줌이 꺼지고 남은 파일을 만들었다. 보고 또 봤다. 다 됐다~ 떡국 먹으러 오라는 외침에 응답했다. 어~~. 그런데 몸이 떨어지질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시간을 보내는 사이 남편이 쟁반에 떡국과 김치를 들고 와서 책상 구석에 놓았다. 먹고 해라. 오, 색깔이 진하네? 맛있겠다. 바로 한 숟갈 떠서 먹었다. 맛있다! 어떻게 한 거야? 별 거 없는데. 짧은 대답을 남기고 남편은 방을 나갔다.
남편과 아이가 다 먹고 일어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도 일어날 수 없었다. 쟁반 위 음식들은 한 숟갈 뜨고 그대로였다. 남편이 열린 방문을 슬쩍 보더니 말했다. 밥 먹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밥을 빨리 먹고 하면 되잖아. 끝내고 먹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최종적으로 할 마무리 확인 작업만 남겨 두고 쟁반을 당겨왔다. 식은 떡국과 차가운 김치를 씹어 삼켰다.
오늘은 엄마랑 같이 아침 먹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있기에 나도 나갈 채비를 하고 아이가 점심식사 후 먹을 간식 도시락을 준비하느라 늘 시간이 촉박해서 아이에게 아침을 먼저 챙겨주고 나는 아이를 데려다주고 돌아와서 챙겨 먹기 일쑤였다. 전날 저녁에 사 온 생크림번을 반으로 갈라 아이가 먹을 때 같이 먹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는 몰라도 엄마가 준비가 되지 않아서 지각하게 되는 일이 염려되어 서두르다가 아침 식사는 오늘도 아이 혼자 했다. 일찍 일어나면 되는데 의지대로 되지 않아서 그건 안 되겠고..
커피를 일찍 마셔볼까. 번을 두고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커피 한 잔 내렸다. 커피 마시고 생크림번 한 입 베어 물고, 다시 커피 한 모금. 너무 맛있는데? 오랜만이었다. 얼마 전 커피머신을 세척한 이유도 있겠지만 갓 뽑은 커피를 바로 마셔서 그럴 것이다. 집안일을 다 끝내놓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하려고 커피를 뒤로 미뤘다. 때가 되었다며 커피를 뽑아와 테이블에 두고는 스마트폰에 쌓인 톡을 확인하거나 영어 공부를 잠시 하다가 커피잔을 잡으면 차가웠다. 따뜻하고 부드러워. 달콤하고 맛있어. 감탄하며 먹었다. 스마트폰을 잠시 보다가 얼른 커피잔을 쳐다보았다. 조금 남은 커피. 한 잔 더 하자. 마시던 컵에 커피를 받아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두 번째 커피는 기대보다 맛이 없었다. 온전히 즐길 준비가 다 되어 있는데. 배부른 상태라 그런 지 몰라도 쓴 맛도 강하게 느껴졌다.
예측하지 못한 데서 얻는 즐거움. 아이가 떠나고 혼자 남은 식탁에서 생각 없이 마신 첫 모금에서 느낀 달콤 쌉싸름한 맛은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쌀쌀한 바람을 맞은 몸속으로 따뜻한 액체가 들어와 긴장이 스르르 풀리고, 씁쓸함을 생크림으로 중화시키며 달콤함이 더해지는 순간. 그 순간은 재현될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커피를 마실 때 1월 1일의 떡국이 생각났다. 다시 맛볼 수 없겠지.. 내년에 끓여주면 하던 일 멈추고 바로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