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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 Jul 05. 2023

아빠 손에 들린 구구크러스터

썩은 치아를 남기고 간 사랑



새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새언니: 아가씨! 냉동실 여유 있나요?
나: 왜요?
새언니: 아이스크림을 좀 주문했어요.
나: 에이~ 아이스크림 정도는 들어가죠.


새언니도 엄마만큼 손이 크다는 걸, 잠시 잊었다.

아이스크림이 커다란 박스로 왔다. 겨우 공간을 만들어 아이스크림을 욱여넣고 웬 아이스크림이냐고 물으니 볼 때마다 오빠가 아가씨 이야기를 한다면서 생각나서 보냈다고 했다.


“우리 OO이 구구 젤 좋아해”




유독 단 걸 좋아했다. 나도 아빠도.


아빠 건강 때문에라도 엄마는 절대 설탕을 뿌려 먹지 말라고 했건만 엄마가 자리를 비우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딸기 위에 소복하게, 토마토 위에 소복하게 설탕을 얹었다. 토마토는 토마토과즙과 설탕이 만나서 걸쭉한 토마토 국물이 생기도록 얼마 간은 냉장고에 넣어 두기도 했다.


부녀의 호흡은 환상이었다. 냉장고에 넣어 두고 먹는 걸 까먹은 날이면 엄마 잔소리에 나도 아빠도 한참을 시달려야만 했지만, 혼나고 나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엄마가 자리를 비우면 우린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의 기호는 묻지 않고 설탕을 뿌렸다.


그런 내가 가장 좋아한 아이스크림은 달디 단 구구크러스터.

통에 든 아이스크림이니 양이 꽤 됐지만 앉은자리에서 한 통을 거뜬히 비웠다. 한통을 뚝딱 해치우는 딸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니 아빠가 집에 올 때면 언제나 아빠 손에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아빠의 귀가가 늦어지는 날엔 꼭 내 방으로 가지 않고 아빠 침대에 누워 기다리곤 했고, 지루한 기다림이 눈꺼풀의 무게를 끌어내리면 곤히 잠이 들곤 했다. 엄마 표현에 의하면 귀신이 물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귀가 어두웠는데 아빠 손에 들린 봉지 소리만 듣고도 귀신같이 깨서는 한 통을 후딱 비웠다고 했다.


그리고는 다음 날이면, “뭐야 나 어제 아빠 방에서 잤는데 누가 내 방에 데려다 놨어?”했다.


가족들은 경악했다. 오빠는 몽유병이라며 진짜 기억 못 하냐 물었고, 엄마는 비어 있는 구구크러스터 통을 보여주셨으나, 잠신 들린 내가, 먹었을 리 없었다.


기억하진 못해도, 그렇게 정신없이 먹고 바로 잔 날이 하루이틀이었을까? 아빠의 사랑은 충치를 남겼다. 아주 많이. 엄마는 아빠가 떠나고도 치과를 다니는 나를 보며, “참 좋은 유산을 남기고 갔어 아주”하며 못마땅해했다.


아빠가 좋아하던 투게더를 먹을 때면, 돈 버는 딸이 사다주는 아이스크림 한 번 못 먹고 뭐 그리 급해 가는 걸음을 재촉한 건지 괜시리 아빠가 밉다가도 이내 짠하다. 아빠의 빈자리가 느껴질 새라 여전히 아빠 몫까지 온 마음을 기울이고 있는 오빠의 속정에 눈가가 뜨겁다.


31가지 맛을 골라 먹을 수 있는 곳에 가서도 아빠는 왠지 내가 절대 이해 못 할 “바닐라맛”을 고를 거 같지만, 왠지 아빠가 생각나는 메뉴 “아빠는 딸바봉”을 주문해 보리라. 아직 한 번도 주문하지 못했다. 아이스크림 이름 하나에, 세상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받고서도 속절없이 울어버릴까 봐. 아이스크림 앞에서는 아직도 아빠 손에 들린 그 아이스크림을 기다리던 그때의 내가 있다.  



아빠. 31가지 맛을 골라 먹을 수 있는 곳에
아빠는 딸바봉 먹으러 갈래?
바닐라맛 말고도 맛난 게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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