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 K와 3차 퇴사 면담
2022.2.16
상사 K와 3차 퇴사 면담이 있었다.
시작과 동시에 상사 K는 참을 수 없는 팀장과 내가 역시나 한 조직에 있기는 어려운 일 같다고 했다.
놓아주고 싶지만, 아직 놓아주고 싶지 않은 그의 다른 제안이 시작되었다. 내 메일에 대한 심사숙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 메일을 쓰기 위한 내 며칠간의 고심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며, 그는 이제 다른 조직이라도 가고픈 곳이 있는지를 물었다. 잠재적 리더라 타 팀으로 이동하기도 쉬울 거라는 제안과 함께 내 커리어를 생각해서라도 사내 다른 곳에서 역량을 발휘했으면 좋겠다는 빤한 이야기를 했다.
와닿지도 않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제안이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은 더 신중하자 싶어 그나마 우리 회사에서 갈만하다 생각한 팀에서 우리 팀에 전배를 온 언니, 우리 팀에 있다가 다른 팀으로 전배를 간 동갑내기 친구에게 넌지시 물었다. 전배하고 지낼만하더냐고.
질문을 간파한 언니가 하달을 그대로 처리해야 하는 그 팀의 업무가 내 성격상 맞지 않을 거란 조언과 함께 회사생활 다 거기서 거기라는 속내를 넌지시 이야기했다. 언니의 솔직함 덕에 더 고민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결론이 섰다.
사실 퇴사 결심 이후로 사내 공모가 뜰 때마다 고민을 했었다. 이직은 아니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옵션도 충분히 고려한 후라야 후회는 없겠다는 생각으로. 나이 마흔에 다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일을 배워야 한다는 두려움과 별개로, 곧이곧대로 주어진 일을 하지 못하고 늘 "왜"라는 의문을 품는 나는 명분을 위한 일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내가 옮기고 싶다고 받아줄 리 없는 그 팀에, 나는 어떤 존재일 수 있을까를 오랜 시간 고민했었지만 썩 달갑지 않을 거란 생각에 끝내 지원하지 못했었다.
잠재적 리더로 선정된 이가 퇴사를 하면 조직장의 고과에 마이너스가 된다고 들은 터라, 오늘 그의 제안은 더 이상 나를 위한 제안이 아니요, 그동안의 퇴사 만류가 진짜 나를 위한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헛헛했다.
잠시나마 상사 K의 만류로 계속 다녀주길 바란 가족들에게, 이제 마지막 승부수를 띄울 때가 되었다.
나의 대기업 명함은 줄곧 우리 가족의 자부심이었다. 누가 딸 어디 다니냐고 물으면, “대기업 다녀요” 할 수 있게. 갖은 고생을 해온 터라 내 딸은 나랑 다르게 제 명패 걸린 자리에 앉아 펜대를 굴리며 살기를 바란 엄마의 자부심.
그래서 우리 가족은 나의 퇴사를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엄마는 자꾸만 회사에서 나가라고 했냐고 물었다. 내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고, 하고픈 일이 생겼다고 해도 회사 다니면서 병행해 보면 어떻겠냐고 회유하려 했다. 월급 따박따박 받는 게 지금 같은 불경기에 얼마나 큰 복인데 제 발로 그걸 걷어차냐고 화를 낸 날도 있었다.
대기업이 아니었던 첫 회사를 퇴사할 때도 응원해주진 않았었다. 적은 월급이어도 잘 다닌다고 믿었던 딸이 어느 날 갑자기 “캐나다 갈 거야”라고 통보하고 뚝딱뚝딱 준비해서 홀연히 떠났을 때도, 가족들은 적잖이 충격을 먹었다.
엄마는 그때 이후로 이따금씩 목돈이 필요한데 빌려줄 수 있냐고 내가 모은 돈을 빌려갔다. 선녀와 나무꾼의 나무꾼처럼 옷가지를 챙기듯 나의 쌈짓돈을 들고 있으면 엉덩이가 가벼운 내가 훌쩍 떠나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이번에도 사실 수순은 비슷했다. “퇴사할 거야. 더는 미룰 수 없을 거 같아”의 일방적 통보. 하지만 나의 퇴사는 내 인생이니 온전히 내 선택과 결정이면서도, 나의 명함은 엄마의, 가족의 자부심이었기에 가족들에게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때부터 신랑보다 더 힘든 가족들의 퇴사 지지 얻어 내기가 시작됐다.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냐고 가만히 붙어 있으라는 오빠와 실없는 소리 하는 줄 알고 대꾸도 안 하는 엄마와 언제나 말을 아끼는 우리 새언니가 있는 카톡 방에서 꾸준히, 나의 지구력을 시험하며, 내 인생 최대의 인내심을 내보이며 나는 지치지 않았다. 연말에 광주에 가서 앞으로 어떻게 살 거라는 이야기를 길게 내뱉고도 여전히 기가 찬다는 가족들의 표정을 보면서 끝은 항상 “내가 평생 불행했으면 좋겠어?”의 협박조 마무리였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꾸준히 대화거리로 삼은 덕분인지 카톡 방에서 가족들은 내 퇴사를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그만두라고 했다가, 어느 날은 홀가분하냐고 꼬았다가. 어느 날은 제발 붙어있으라고 했다가 어느 날은 생활비는 못 보태 줘도 소고기는 사줄 수 있다고 한껏 현실적이었다가. 여전히 오락가락 하기는 했지만.
면담이 끝난 직후, 가족 카톡방에서 번개 투표를 했다.
1. 퇴사를 하고 조카를/손주를 낳는 동생을/딸을 보겠다.
2. 조카/손주 없이 회사에 얽매여 불행한 동생을/딸을 보겠다.
새언니가 역시나 바로 투표로 지지를 보냈다. 111111111111이라고.
누구보다 외손주를, 조카를 바라는 가족들을 생기지도 않은 애를 빌미로 억지로 퇴사 지지를 얻어냈다. 엄마는 가진 것 없이 둘 다 배짱도 좋다고 하면서 애 없으면 아등바등 살일 없다고 애부터 낳으라고 응원했고, 새언니도 애를 낳으면 회사에 얽매이고 싶으실 거라고 웃으며 응원해 주었다. 오빠는 언제 외삼촌이 되냐고 늘 나를 쪼던 사람인지라 안 봐도 비디오.
아직 애를 낳을지. 낳겠다고 결심한다고 애가 생길지 모르겠지만.
이제 다들 준비가 됐다. 죄책감이 느껴지는 반협박에 의한 지지였지만 나는 가족들을 설득했다고 믿는다.
얼마 전 나의 퇴사를 가장 반대했던 현실적인 우리 오빠가 엄마아빠의 결혼기념일 글을 보고, 장문의 톡을 보냈다. 퇴사 후 찾은 광주에서 엄마가 아픈 건 네가 회사를 그만둬서라고 광주에 있는 내내 잔소리를 하던 오빠의 카톡을 보니, 어떤 마음으로 내가 회사에 남아 있기를 바랐는지가 너무 와닿아 종일 먹먹했다.
그때로 돌아가도 매일매일이 너무 무섭고 슬픈데 차마 어린 동생한테도 그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는 그때에 대한 오빠의 이야기와 함께 퇴사에 대한 속내를 이어갔다.
둘째로 태어난 김에, 둘째처럼 막내처럼 살았으면 한다. 짐이나 부담은 좀 나한테 미루고 하고픈 거 하며 재밌게 살기를.
퇴사를 하고 네 인생을 찾아가는데 마음속으론 응원을 하면서도 행여 돈 몇 푼에 힘들고 생각이 고단할지 몰라 내심 걱정도 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같아 다행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잘나고 똑똑한 딸로 엄마 기를 세워줘서 고맙고, 항상 의지가 되는 동생이라 고마웠다. 이젠 겉으로 보이는 명품이 아니라 네 행복을 위한 진짜 행복이라는 명품을 걸치길 바랄게.
내가 캐나다에 가기 몇 해 전에, 영문과를 나와 방황하던 오빠에게 엄마는 미국 유학을 제안했었다. 오빠는 모은 돈도 없이 손 벌려 가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엄마랑 내가 밟힌다는 이유로 선뜻 떠나지 못했다. 오빠는 아빠가 가시고, 늘 가장으로 나와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첫째의 책임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살아왔다.
같은 처지였지만, 둘째이고 막내였던 나는 엄마에게 손을 벌려 캐나다에 가면서도 당당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늘 이기적으로 나 하고픈 것만 하고 살았는데, 모든 짐은 늘 오빠에게 미뤄두고 살았는데, 오빠는 여전히 내가 둘째처럼, 막내처럼 살기를 응원하고 있다.
가장 중요하지만, 당장 급하지 않은 일은 언제나 순위에서 밀린다.
언젠가부터 머릿속에서 이런 셈을 하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 꼬박꼬박 광주에 가더라도 토요일, 일요일. 단 이틀뿐이고. 그중에서도 피곤하다는 이유로 잠자는 시간을 제하면 1년을 꼬박 가더라도 보름남짓인 셈.
1년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이 고작 보름이라는 그 셈에 적잖이 충격을 먹었었다.
그래서 나는 당분간 우선순위를 가족에게 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