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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 Jun 19. 2023

참을 수 없는 팀장이 나가라는 시그널을 보냈다.

모두에게 끝이 좋을 필요는 없다.


2023.02.13


하루 종일 화가 가시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고, 해석되지 않는 아침의 그 전화.


2월 말 퇴사를 앞두고 지주사에 인사를 드릴 겸 미리 잡아둔 점심식사가 있어 재택 대신 거점오피스 신청을 했다. 오피스에 도착해서 메일을 훑어보고 있는 중에 참을 수 없는 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8시 40분. 급한 용무가 아니면 굳이 전화할 시간은 아닌데, 뭘까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팀장: 2월 말 휴가 가기 전에 그 프로젝트 어떻게 할 거예요?
나: 프로젝트 팀에서 아직 수정 중이고 최종안이 나온 게 아니라서 지금 단계에서 챙길 건 없고, 휴가 다녀와서 챙겨도 될 정도로 촉각을 다투는 건 아니더라고요. 제가 다녀와서 챙길게요.
팀장: 아니, 수정될 것도 거의 없어 보여서 그게 최종안 같던데 뭔가 조치를 취하고 가야 하지 않아요?
나: 그리고 그게 프로젝트니, 제가 단독으로 결정할 건 아니니 다른 분과도 이야기를 해볼게요.
팀장: 아니 그렇게 대책 없이 휴가를 가면 어떡해요?
나: 이건 퇴사를 전제로 잡힌 휴가고, 여행 전에 제가 챙길 건 안 놓치고 챙길 거예요. 그리고 PM이 단독으로 결정할 건 아니잖아요?
팀장: 아니, 무책임하죠. 여행 다녀와서 챙기기엔 늦을 수도 있잖아요.


... 대화가 계속 겉돌었다. 그러다 이내 태도 지적으로 전환되었다.


팀장: OOO님 왜 이렇게 공격적이에요?
나: 제 입장에선 OOO님이 더 공격적인데요?
팀장: 아니, 팀장이 이야기를 하는데 왜 제멋대로 해요?
나: 제가 PM인데, 제 선에서 한 결정이 지금 전혀 급하지 않아서 휴가 다녀와서 챙기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왜 존중을 못 하시죠?
팀장: 이렇게 공격적이라는 이야기 다른 팀원들도 해요.
나: 누가요?
팀장: 왜요? 가서 따지게요?


하. 나는 거기서 더 대화할 의지를 잃었다.


나: 아뇨, 믿을 수가 없어서요. 그냥 담당자를 바꾸고 싶으신 거 같은데, 바꾸고 싶으시면 바꾸세요.
팀장: 네. 그럼 담당자 바꿀게요. 근데 진짜 이런 식의 태도는 팀장한테 할 건 아니죠.
나: 팀장이라는 이유로 이런 식의 태도도 곤란하네요. 급하지도 않은 건으로 지금 물고 늘어지시는 거 제 입장에서도 이해는 안 되어서요.


조금 뜸을 들이고, 최후의 통첩을 했다. 그게 전화를 건 팀장의 의도 같아서.


나: 역시나 제 처음 결정이 옳았네요. 상사 K한테는 그동안의 만류에 대한 답을 오늘 이 사건을 계기로 명확히 전달할게요. 끊을게요.


불과 한 달 전.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참을 수 없는 팀장이 고과면담을 하면서 본인이 지주사에서 했던 일은 미안하다며, 그건 두고두고 갚아 나가겠다고, 앞으로 잘해보자고 했다. 반신반의했다.

뭔 짓을 했는지 알기는 아는 건지, 아니면 리더십평가를 염두에 두고 약을 치는 건지 모르겠는 그의 사과를 들으며, 뭘 어떻게 갚겠다는 건지 내심 궁금하기는 했다. 내가 그 변화를 보고 나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내가 절대 변하지 못할 거라 믿어온 그 팀장이 변할 수 있기를 희망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신도 가득했다. 진심으로 변화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기보다는 상사 K가 알려준 걸 고스란히 읊는 건지, 아니면 그즈음 읽은 어느 책에서 그런 비슷한 내용을 일러준 건지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오늘 역시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과 역시나 그 말은 그저 팀장놀이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출장길에 오르던 상사 K가 점심을 먹고 나니 문자로 그때 말한 메일을 달라고 했다.

왜 이 와중에 챙기는 걸까 싶었지만, 말을 재빠르게 옮기는 참을 수 없는 팀장이 그새 옮긴 것이라 생각하고, 오전 그 일이 있었기에 참을 수 없는 팀장과는 같은 조직에 있을 수 없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이어서 메일도 보냈다.


애초에 퇴사로 길을 정한 터라 어떤 의욕도 없었지만 그 메일은 보냈어야 했고, 며칠간 생각하면서 상사 K가 놓아주기 용이하게 가장 우선순위로 거절하기 좋은 이유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터였다.


"팀의 재조정(세분화) 및 파트 개념 도입"

R&R이 혼재된 지금 팀의 R&R 정립을 위해 팀 신설이면 좋겠지만 아닐 경우 파트 개념이라도 도입해서 참을 수 없는 팀장과는 업무의 독립을, 그리고 제가 리더십을 trial 할 수 있거나, 성장감을 느낄 수 있는 방안으로 고민해 주셨으면 좋겠다로 시작했다.


분명히 거절할 것이다. 조직에 팀을 하나 만들기도 쉬운 일은 아니요, 갑자기 명분도 없이 나에게 그런 책임감을 부여할 생각도 없을 거란 걸 알기에.


읽어는 볼까 싶은 메일을 그래도 나름 항목을 여러 개 넣어가며 간절한 청을 드리듯 메일을 썼다. 나가겠다고, 더 이상 남을 이유가 없는 내가 상사 K의 체면을 생각해 실장님께 보여드려도 무례하지 않을 간절함이 묻어나는 남아야 할 이유에 대한 청을 쓰자니 현타가 온다. 이 상황이 짜증이 나면서도 웃겼고, 화가 나면서도 웃겼다.


조직장은 만류하고, 팀장은 그만두라는 시그널을 보내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위하여 그 메일은 또 보내고 있는 건지.


“두 분 제발 합 좀 맞춰주실래요?”






나중에 알았다. 그날 바로 팀장이 새로 들어온 후배들을 불러 발단이 된 일의 담당자를 바꾸면서, 내가 퇴사할 수도 있을 거란 이야기를 했다는 걸. 그러면서 상사 K가 설득 중인 상황이라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는.


그리고 내가 휴가를 다녀오고, 그는 자녀 돌봄 휴가로 2주 간 자리를 비웠다. 내가 휴가를 다녀온 후 그가 공백일 때, 그 일을 처리하는 게 싫어서는 아니었을까? 아니면 퇴사를 핑계로 2월을 꽁으로 논다고 생각한 그는 나에게 화가 난 걸까? 왜 굳이 아무 급할 일 없는 그 일로 내게 전화를 해서 분풀이를 한 건지.


역시나 내가 휴가 간 동안 급할 것 없던 그 일은 아무것도 진척되지 않았다.


그날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그 말대로 참을 수 없는 팀장과 얼굴 붉힐 일 없이 웃으며 안녕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그 대화 이후로 나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퇴사하는 날까지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퇴사 일정, 인수인계 논의를 하자는 팀장의 메신저 제안에, 꼭 얼굴 보고 해야 할 말이 아니면 메신저나 메일을 달라고 했고 퇴사하는 날까지 절대 얼굴을 마주칠 일을 만들지 않았다.

싸움은 수준이 같아서라고 하던가? 나도 참을 수 없는 팀장도 똑같은 수준이었던 거다. 그리고 팀장도, 나도 그날의 대화 이후로 서로에게 어떤 화해의 손길도 내밀지 않았고, 퇴사하는 날도 나는 굳이 인사하지 않았다. 팀장이 화해를 했어도 나는 그의 사과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고, 나도 끝이 다 좋을 필요는 없다는 결론으로 앞으로 살면서도 스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을 뿐이다.


얼마 전 유튜브를 보다가 끌린 책 “마흔_다시 만날 것처럼 헤어져라”를 읽다 보니 읽을수록 참을 수 없는 팀장이 오버랩되었다.

헤어질 때 잘 헤어져야 한다는 소주제에 다음 구절이 있었다.


글로 남겨 두면 잊고 있었던 구체적인 상황과 감정이 떠올라 두고두고 곱씹으며 기분 나쁠 수 있다. 좋지 않은 감정은 계속 남겨 두는 것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마웠던 점에 대한 감사, 부족했던 점에 대한 미안함, 훗날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한 기약 정도면 충분하다. 마음에 없는 외교적인 화법이어도 괜찮다. 상대도 그것이 인사치레로 하는 말임을 안다. 차가운 거절을 당했다는 느낌은 덜 주면서, 나에 대한 앙심을 품지 않을 정도의 인사면 된다.


책을 덮고도 오랜 시간 생각하고 괴로웠다. 용서는 나를 위한 일이라고 하던가. 책을 읽고도, 답을 알고도, 나는 그때로 돌아가면 책에서 배운 대로 인사치레라도 할 것인가, 아니면 역시나 마음의 소리를 따를 것인가 물었지만, 아직 나는 마음의 소리를 따르는 내공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참을 수 없는 팀장이 그렇게 양서를 읽고도 변하지 못했던 것처럼, 깨달음은 별개였고, 나 역시 그 깨달음이 변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퇴사 직전 보직을 맡고 있던 분들만 유독 끝이 좋은 게 좋다고 팀장과 마음에 진 응어리는 다 풀고 나갔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밥 한 번 먹는다고, 술기운을 빌어 마음의 빗장을 푼다고, 그 끝에 애써 웃어 보인다고, 진짜 마음에 진 응어리가 없어질 수 있을까?  


다시 스치지 않기를 바랄 뿐, 다시 만날 것처럼 헤어지는 건 나와 팀장 사이에는 불가한 일일 듯 싶다.

나이 마흔,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된다는 불혹에도 왜 나는 그 무거운 숫자만 채워버린 건지.

언제고 어른이 될라나 생각하면서도 끝끝내 고집스러운 나. 아직은 이게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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