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어나 Jun 15. 2023

퇴사하는 나에게 과제를 준 상사

조직에 남아야 할 이유, 그 방향성


2023.02.07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그답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등신이다.

아니, 퇴사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왜 내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해서 그에게 메일을 써야 할까?


상사 K가 시키는 일도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숱하게 거절을 잘도 해놓고, 아이러니하게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상사 K가 서운하지 않게 돌려 돌려 거절한다는 게 면담이 끝나고 보니 나에게 또 과제가 떨어진 거다.


보고서는 잘 쓴다면서도 절대 직접 쓰지 않는 그는, 퇴사를 한다는 조직원에게 남아야 할 이유를 메일로 달라고 끝까지 그가 할 일을 미뤘다. 솔깃한 제안도 없었건만, 애증이고 나발이고 정에 이끌린 건지 뭔지 모를 감정에 과제를 받아 온 내가 한심해 미칠 지경이다.


오늘 오전 상사 K는 출근하자마자 나를 찾았다. 그렇게 시작된 2차 퇴사 면담.

답이 바뀌었길 기대하며 주말 동안 고민한 생각의 결과를 물으셨고, 답이 바뀌지 않았다고 말씀드렸다.


다시 남는다는 결정에는 걸리는 것이 많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경직된 조직에서 다시 마주할 실장도, 참을 수 없는 팀장도 넘기 힘든 벽이라고 말씀드렸다. 최근에 잡음 없이 지내는 것 같은 시간들은 잘 지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본 시간이 아니라 제가 곧 그만둘 생각에 어떤 대립각도 세우지 않았기에 가능했지만, 그 속이 마냥 편하지 않았다는 말씀도 드리며. 다시 남기로 하는 결정에 인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 내린 결정이니 존중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답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서운하셨기 때문인지, 방향을 쪼금 바꾸셨다.


상사 K: 너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나: 제가 감사한 건 많겠지만, 미안할 건 뭐가 있을까요?
상사 K: 야, 밥상 다 차려 놨는데 너 안 먹고 나가는 거잖아. 그게 얼마나 서운한지 알아?

순간 화가 났다.

나: 밥상 차려놨는데, 밥 먹는 순서 늘 정해져 있었잖아요. 하나는 팀장이라도 달아보고, 하나는 미국 땅이라도 밟아봤지, 인제 순서 왔다고 안 먹고 나가는 마음을 서운해하시면 안 되죠. 그거 안 먹는 건 제 선택인데 제가 왜 미안해해야 해요? 제가 더 고파 보인 적은 없었어요? 밥상 차려 주실 수 있는데, 더 고파 보이는 놈, 밥 아니어도 다른 거라도 슬쩍 내어줄 수 없었어요? 제가 주린 기간이 있는데 그건 눈 싹 감고 이제야 차려준 밥상 안 받고 나간다고 제가 왜 미안해해야 해요? 감사한 마음은 그만두기 전에 따로 자리가 있을 테니 그때 전달 할게요.


그랬다. 늘 연공서열이었다. 상사 K는 연차, 나이로 줄 세우기를 좋아한다. 가장 편한 연공서열. 그저 꼬인 군번이라고 이야기하던 상사 K는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고, 이번에 임원 교육받으면서 연공서열을 타파하라는 교육을 들었다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감사한 건 너무도 많다. 그가 나를 소개한 것처럼 나는 그에게 aggressive 한 후배가 맞다. 상사 K는 대기업 상무님이니 이제 막 회사를 들어온 친구들에겐 어려운 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입사한 날(그때는 과장님이셨던 K)부터 그가 단 한 번도 어려운 분은 아니었다. 상사 K에게 하고픈 말은 마음속에 담아 두지 않고 말씀드렸고(물론, 다 말씀드린 건 아니었다. 나도 나름 사회생활이란 걸 흉내내기는 했으니), 누군가는 그와 나를 보고 티키타카라 했고, 누군가는 사이다 발언을 해주어 고맙다고도 했다. 그래도 그저 우스개로 넘겨주신 그 해량에 감사한 마음이 진짜 차고 넘치지만, 죄송한 건 없었다.


그래도 그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다닐 수 있겠는지를 물으셨다. 어떻게 해도 다닐 생각이 없는데, 자꾸만 다른 생각을 강요했다. 업무의 독립성이 있었다면 좀 낫지 않았을까, 가슴 뛰는 일을 응원해 주는 분위기였다면 좀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했었다고, 그런 고민은 좀 하셨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는데, 그의 열정에 또 졌다.


상사 K: 와 ~ 그런 이야기 너무 좋다. 그런 부탁을 하는 메일을 주면 실장님과 상의해 보고 답을 줄게. 그럼 어떨까?
나: 고민하시라고 드린 답인데, 제가 퇴사를 앞두고 무슨 에너지가 있어 그런 메일을 쓰나요?


상사 K는 더 이상 듣지 않고, 그렇게 면담을 마무리했다. 왜 퇴사를 앞두고 내가 다시 조직에 남을 방향성에 대한 답을 드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는 왜 단 한 번도 왜 퇴사하는지는 묻지 않았을까? 그저 본인을 제외한 외부 요인에서 답을 단정 짓고 나와서 나가겠다는데도 조직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담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과제를 주는 상사 K를 보며, 나는 왜 퇴사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끌려다니고 있는지 나의 미련함과 우유부단함에 진저리가 쳐졌다.


일단 2월 퇴사는 어려울 것 같아 3월까지 보류하는 것으로 하고, 2월 말에 잡힌 원래의 퇴사 여행은 다녀오겠다고 했다. 10일간의 공백. 일단 휴가만 생각하기로 했다.




며칠간 몇 번이고 이불킥을 했다.


이제 그만 연을 끊고 나가고 싶다는데, 그것도 업계에서 이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영영 떠나겠다는데, 여전히 상사의 지위에서 당연하다는 듯 본인의 과제를 나에게 넘긴 그에게 그동안의 aggressive를 왜 보여주지 않은 건지.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그 철학을 실천하겠다는 나의 미련함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밥상 한 번 시원하게 뒤엎고 그냥 나가겠다고 할걸. 그게 그가 생각하는 내 캐릭터에도 부합할 텐데. 실상은 그런 내가 아니라서 화가 났다.


주린 배로 한참을 숟가락 들고 내 순서만 기다렸는데, 또 당연한 듯 내가 후배들보다 먼저 숟가락을 들고 싶지도 않다. 그냥 어려도, 경력이 짧아도, 눈빛이 더 고파 보이는 친구가 그 밥상을 먼저 받았으면 좋겠다.


상사 K의 연공서열대로 미국 간 여자애 다음으로 내가 갈 순번인 그 국제회의를 혹여 한 번도 안 가봤다는 이유로 참을 수 없는 팀장이 가게 될까 봐 퇴사 직전 부득이 우겨 다른 후배를 추천했고, 다행히 그 국제회의는 그 후배가 다녀왔다.


그저 꼬인 군번이라고 했다가, 나중엔 연공서열대로만 기회를 부여해서 미안했다고 한 상사 K가 후배들에게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시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는 판타지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