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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나 Jun 13. 2023

퇴사는 판타지일까?

상사 K의 만류


2023.02.02 


어제저녁 상사 K가 문자를 보냈다. 그 문자를 받고 무슨 의도로 보내신 건지 진심 모르겠어서 밤참을 설쳤다.


OO아 지난주에는 전화해서 엄청 뭐라고 할뻔했다. 내가 뭐라고.
많이 누그러졌어. 마음이 다 누그러진 건 아니지만, 내일 아침에 시간 되니?


“그만두겠습니다”하면 다음 날부터 바로 인수인계가 시작될 거라 너무 쉽게 생각한 걸까?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상사 K와의 진짜 퇴사 관문이 시작되었다.


상사 K: OO(참을 수 없는 팀장)이랑 일을 독립적으로 하는 건 어떠니?
나: 어떻게 독립적으로 일을 해요? 근데 저 참을 수 없는 팀장 때문에 그만두는 거 아닌데요.
상사 K: 그럼 뭐 퇴직금으로 카페라도 차리니?
나: 12년간 어떻게 번 돈인데 카페에 돈을 버리나요?
상사 K: 그럼 뭔데?
나: 그냥 하고 싶은 게 생겼어요.
상사 K: 그게 뭔데?
나: 나중에 성공하면 말씀드릴게요.
상사 K: 신랑 믿고 그만두는 건 이해하는데, 카페 같은 거 아니면 좀 더 다니면서 하고 싶은 걸 병행해 보는 건 어떨까? 적은 월급 아닌데 그래도 뭔가를 만들어 놓고 나가야 하지 않겠니?

말할까 말까 내적 갈등을 하다가, 언제고 말할 거 같아 솔직해졌다.

나: 신랑 믿고 그만두는 거 아니고 신랑도 저도 같이 퇴사해요. 글로벌 파견 이후 저희가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고민 끝에 결정한 거예요.
상사 K: 신랑도 그만둬? 그럼 너라도 벌어야지?
나: 저만 돈 벌기 억울하잖아요. 놀 때 같이 놀아야지.
상사 K: 둘이 세계 여행이라도 가게? 남들 다 간다고 너도 유행처럼 하게?
나: 아니요. 당장은 아니고 내년쯤 갈 생각은 있어요. 세계는 아니고 그냥 편도 티켓 끊어서 자유롭게 표류하다가 여행이 일상이 되어 지겨워지면 그때 돌아오려구요.
상사 K: OO아~그건 판타지야. 너 너무 꿈속에 있다. 판타지는 깨야지.
나: 판타지에 좀 취해 있을게요. 사실 신랑과 취미로 만났는데, 신랑은 지방사람이라 결혼하면서 저 때문에 이직을 했는데, 서울 살이가 팍팍하대요.
상사 K: (어느새 관심은 딴 곳으로) 취미가 뭔데?
나: 비밀이에요.
상사 K: 와. 말할 거면 다 말하지. 왜 궁금하게 해 놓고 말을 안 해? 등산?
나: 쉽게 생각하실 수 있는 취미는 아니에요.
상사 K: 그래서. 뭐 할 건데? 나한텐 솔직할 수 있잖아.
나: 나중에요. 기회가 되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잠시 서운함과 궁금증이 교차하는 표정을 애써 감춰가며,

상사 K: 그냥 올 한 해 설렁설렁 회사 다니고 내년에 미국 가고, 다녀와서 2년 정도 더 다니면 어떨까? 너 조직장이 설렁설렁 다니라고 말해주는 거 쉬운 거 아니다?
나: 4년을 더 다니라고요?
상사 K: 네가 뭔 바람이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뇌를 어디다 두고 왔는지 모르겠는데, 이성 좀 붙들어봐. 응?
나: 아…


그는 내가 수많은 후배들 가운데 그저 “one of them”은 아니라고 했다. 이제 밥상 차려줬는데 먹어 보지도 않고 밥상 엎는 게 서운하다고. 대화를 하다 보니 어제 그 문자가 이해가 갔다. 그는 순전히 참을 수 없는 팀장 때문에 내가 그만두는 거라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고,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오롯이 그 이유이길 바라는 것 같았다. 퇴사의 이유에 그가 없길 바라는 눈치.


고과도 나왔겠다 조직장이 해줄 수 있는 연봉인상을 운운하면 너무 크게 실망할 것 같았는데, 다행히 돈 이야기를 안 해줘서 고마웠다. 어쨌든 내 입장에서 퇴사의 가장 큰 이유가 참을 수 없는 팀장이라고 생각하고 고민은 하고 나온 듯 했고, 진심으로 나의 퇴사를 만류하려는 그의 의지는 충분했다.


시간을 줄 테니 주말 동안 신랑과 많은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셨다. 진지하게 둘 다 이성을 붙들고 냉철하게 현실적으로 생각하라고.


신랑이 지난해 퇴사할 때 대표님이 개인사업자를 내는 걸 도와줄 테니 계속 이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심 그가 너무 부러웠다. 누군가가 아쉬워하는 퇴사, 누군가가 붙잡는 퇴사를 하는 그의 능력이 샘이 났다.


그의 퇴사를 지켜보면서 나의 퇴사가 다가올수록 고민이 많았다. 상사 K가 앓는 이를 빼는 마음으로 나의 퇴사를 너무 순순히 받아들이시면 상처가 될까 두려웠었다. 다행히 붙잡아는 주셨으나 마음은 더 무겁다. 더 고민하고 싶은 문제는 아니어서 말씀드린 거라서. 그래도 붙잡는 그의 제안을 단칼에 자르진 못했다.


그가 어떤 의도로 한 말인지도 알고, 그가 그동안 어떻게 나를 보듬었는지도 알기에,

“생각해 볼게요”하고 나오는데, 머리가 아팠다.


집에 오는 내내 오늘의 면담을 곱씹었다. 상사 K가 면담 중 몇 번이고 판타지에서 헤어 나오라고 했는데, 내 이야기 어디에서 판타지가 보였을까? 오랜 시간 회사 안에서 어떤 꿈도 꾸지 못하고 내려놓고 내려놓고, 또 내려놓아 겨우 퇴사까지 이르렀는데, 퇴사가 왜 판타지일까? 억울했다. 설령 내가 회사 밖 행복을 찾으러 나간다는 게 판타지라 한들 그 판타지를 굳이 깰 자격이 있는지, 화도 났다.




주말 동안 내내 머리가 아팠다. 다시 고민할 여지는 없었다.


엄마는 못 이기는 척 그냥 다니면 어떻겠냐고 했고, 신랑은 예의상 단칼에 자르고 나오지 않은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고민을 할 거였다면, 애초에 퇴사일기를 쓰면서 그 많은 것들을 내려놓는 연습을 철저히 해올 이유가 없었다. 다음 주에는 더 단호하지만, 상사 K가 머쓱하지 않게 어떻게 아름답게 거절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뾰족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나에게 어떤 세련됨이 있었다면, 퇴사까지 오지도 않고 조직에 잘 적응한 사람이었을 테지.


이 무렵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며칠 밤잠을 설쳤다.

정체성을 잃고 휘둘리고 휘말린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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