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La Land> 계절, OST를 중심으로
가끔 그런 날이 있다. 특별히 다를 건 아무것도 없는데 갑자기 감성에 젖고 싶은 날. 이유는 모르겠다. 바쁘게 산 몸이 지쳤다고 신호를 주는 건지(그렇게 바쁘진 않았지만), 복잡한 생각은 접어두고 잠깐 쉬라는 건지. 그런 날에는 이불 위에 누워 잔잔한 로맨스 영화를 보곤 한다. 영화에 몰입해서 보고 주인공의 감정을 떠올려보며 서서히 잠을 청하는 게 좋다.
브런치를 처음 쓰게 된 날, 그날도 갑자기 감성에 젖고 싶은 마음이 들어 <La La Land>를 찾아봤다. 라라랜드는 앞서 몇 차례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선율의 OST와 영상미가 풍부한 로맨스 영화를 떠올리며 잔잔한 여운을 기대하고 시청했다. 그러나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스토리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게 됐다.
사랑? 꿈? 라라랜드가 둘 중 어떤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건지 친구들과 이야길 나눈 적이 있다. 볼 때마다 다르게 느껴졌기에 정답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 시청한 라라랜드에선 사랑과 꿈, 어느 하나를 빼놓고선 이야기할 수 없는 아름답지만 쌉싸래한 두 남녀의 이야기를 느낄 수 있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하지만 사람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당장 1시간 전과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고 할 순 없으니까. 라라랜드에서는 인물들의 이런 심경 변화를 계절과 연관 지어 보여준다.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 이에 따라 흐름을 이해하며 보면 첫 시청과는 조금 다르게 보이는 부분들도 생겨난다.
영어엔 워낙 자신이 없기 때문에 영화관에서 볼 땐 전혀 몰랐던 사실이 있다. 흘러나오는 ost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 ost들의 가사를 살펴보면 세바스찬이나 미아가 당시에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작중의 수많은 ost가 단순히 선율만 아름다운 게 아니었단 말이다. 계절과 ost를 중심으로 미아와 세바스찬의 심경을 살펴보면 꿈과 사랑에 대한 두 사람의 마음이 더 이해가 가 라라랜드를 조금 더 온전히 감상해볼 수 있다.
Winter,
서로의 꿈을 이뤄 줄 사람을 만나다.
LA의 두 남녀 미아(엠마 스톤)와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은 각기 다른 낭만적인 꿈을 품는다. 미아는 여배우가 되겠다는, 세바스찬은 정통 재즈를 이어가겠다는 꿈을. 하지만 둘은 차츰 냉정한 현실을 깨달아간다. 배우가 되기 위한 오디션조차 제대로 치를 수 없고, 대중의 외면을 받은 정통 재즈는 이제 연주하기조차 어려워진 녹록하지 않은 차가운 현실을.
세바스찬은 가족한테마저 비판당한다. 세바스찬의 어머니는 낭만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말하며, 보이지 않는 꿈을 좇는 낭만보다 현실을 직시하고 살아가길 바란다. 우리 주변에서도 실상 이런 태도를 많이 볼 수 있다. 세바스찬과 같이 오랜 기간 맹목적으로 꿈을 좇고 있는 사람을 이야기할 때 "아직도 그러고 있어? 얼른 철 좀 들어야 할 텐데."라고 말하곤 하니까.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느껴지는 그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면서.
하지만 둘은 그 꿈이 너무 좋아서 포기할 수가 없다. 그래서 바라게 된다. '내게 날개를 달아주고, 꿈을 이뤄주고 날 도와서 그 꿈이 있는 곳에 데려다 줄 사람을 찾기를'. ♪'Someone In The Crowd'가 바로 미아와 친구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도록 도와줄 누군가를 찾길 바라는 소망이 담긴 곡이다.
이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테마곡 ♪'Mia&Sebastian's Theme'이 흘러나오며 미아와 세바스찬은 재즈바에서 만나게 된다. 꿈을 이뤄줄 누군가를 만나길 소망한 미아는 수많은 군중 속에서 자신을 도와줄 세바스찬을 찾았고, 여기부터 둘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Spring,
서로에게 끌리며 서로를 지탱해주는 존재가 되다.
미아는 여전히 나의 꿈을 이뤄줄 누군가를 찾기 위해 친구를 따라 파티에 나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금은 특이하지만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끼는 세바스찬과 3번째로 마주치게 된다. (우연이 3번이면 인연이라고 하죠. 이게 바로 운명의 데스티니.)
현실을 아예 외면할 수는 없기에 각자 카페, 밴드를 통해 생계를 이어나가는 둘이지만 서로가 나누는 대화 속에서 여전히 꿈에 대한 열정과 자존심이 높다는 게 느껴진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꿈에 대한 갈망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커져간다는 게 참 대단한 둘이다.
둘은 서로 투닥거리며 마치 새로 만난 연인들이 밀당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행동은 서로에게 느끼는 끌림을 그대로 보여주지만 그 마음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게 인상적이다. (이 장면은 언제 봐도 마음을 간지럽혀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사랑의 시작. 언제나 빛나고 아름다운 그 순간!
수 차례의 오디션을 치른 미아는 쓰디쓴 탈락의 경험을 거듭해 자신감이 없어지고, 꿈에 대한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꿈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다. 세바스찬과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때, 배우의 일에 대해 '너무 좋아요'라고 말하지만 그 말이 굉장히 슬프게 들리는 것도 이 까닭이다. 흔들리는 미아를 응원해주며 세바스찬은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자기 캐릭터를 직접 써봐요. 자신에 걸맞은 역할을 직접 만들고 허접한 오디션은 쓰레기통에나 던져버려요."
세바스찬은 미아의 꿈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응원해주며 그 능력을 믿어줬다. 또한 자신의 꿈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미아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어줬다. 미아는 세바스찬의 열정에 끌리며 자신이 잊었던 열정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이런 존재가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가. 미아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게 날개를 달아주고, 꿈을 이룰 수 있게 날 도와서 그 꿈이 있는 곳에 데려다 줄 누군가를 찾게 된 것이다.
그래서 미아는 2차 오디션에서 탈락했을 때도 '리알토 극장'에서 만나기로 한 세바스찬을 떠올리며 곧바로 다시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그와는 다르게 현재 남자친구 그렉은 안정을 추구하고 극장(배우)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미아를 지탱해주기는커녕 그 꿈에 대한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미아는 그렉을 떠나 세바스찬에게 달려간다. 함께 꿈에 대한 낭만을 간직하고 흘러갈 수 있는 그에게로.
사랑을 시작한 두 사람은 <이유없는 반항> 속에 나오는 것처럼 천문대로 향하고 함께 춤춘다. 영화 속의 영화 같은 장면이다. 우여곡절 끝에 남녀가 사랑을 하게 되고 광활한 우주 속을 거닐며 서로에게 점점 밝고 큰 별이 되어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이정표가 되어주는 그런 한 편의 영화.
꿈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을 때, 현실에 지쳐 힘에 부칠 때면 나를 지탱해주는 존재를 원하게 된다. 라라랜드에선 연인과의 사랑으로 표현했지만 그건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있다. 주변에 그런 이가 있고 함께 할 수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한 은하 속에 존재하는 별 중에 나를 향해 빛을 내줄 별을 찾은 셈이니까.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하나다.
나 역시 그 별을 향해 빛을 내주는 거다.
Summer,
사랑 그리고 현실의 벽
여름이 되고 미아와 세바스찬은 계절의 뜨거운 열기만큼 열정적이고도 달콤한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미아는 1인극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어렵지만 한보 발을 내딛고, 세바스찬은 키이스를 만나며 한보 후퇴하게 된다.
사랑과 꿈 사이에 고민하던 세바스찬은 죽어도 하기 싫어하던 현대 재즈를 선택한다. 사랑은 현실의 아픔을 잊게 해 줄 만큼 달콤했다. 하지만 눈 앞에 놓여있는 현실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내가 변하든지 변화시켜야 하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때론 사랑을 위해 현실에 순응해 꿈을 포기하는 선택을 하게 되기도 한다. 세바스찬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며 한보 후퇴하게 된 것이다.
앞서 미아에겐 할 수 있다고 응원했지만 자신의 꿈에 불안을 느끼던 건 세바스찬도 마찬가지였다. ♪'City of Stars'에서 세바스찬은 이 꿈을 내가 이뤄낼 수 있을지, 아니면 이루지 못할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불안한 감정을 드러낸다. 당장 눈 앞에 성과들이 보이지 않는데 그 꿈을 믿고 계속해서 나아간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가 더욱 소중한 존재 아니겠는가.
현대 재즈를 하며 꿈과 멀어져 가는 자신의 모습에 불안해하던 세바스찬은 어디로 가든 상관없다는 가사처럼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기로 결심한다. 지금 이 사랑, 나를 인도하는 빛이 되어줄 미아와 함께라면 꿈을 이뤄낼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에. 그렇게 미아에게 꿈을 향해 나아가라던 세바스찬은 자신의 꿈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그런 세바스찬을 보며 미아는 혼란스러워하게 되며, 이윽고 둘은 군중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혼자가 아닌 둘이 됐을 때 사람들은 꿈보다 안정적인 삶을 많이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그건 책임감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꿈을 이루는 것보다 둘이 함께하는 행복을 지켜가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게 바로 영화와 현실의 차이다. 현실에선 아무리 간절히 바라더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만 되진 않으니까. 그럼에도 우린 매 순간 선택하며 나아가야만 한다.
Fall,
씁쓸함과 함께 열매가 맺히다
꿈을 포기한 세바스찬과 그런 그에게 의문을 느낀 미아. 오랜 시간 동안 보지 못한 둘은 생각보다 많이 어긋나 있었다. 세바스찬은 거짓말로 지금은 이게 자신의 꿈이라 말하며, 이렇게 꿈을 포기한 것은 너 때문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게 된다.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았고 신경 쓸 필요도 없다던 그가 이제는 자신도 철이 들어야 한다며 그렇게 변해버렸다.
미아는 혼자서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 세바스찬은 현실에 타협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간다. 그리고 잡지 촬영 중 치게 된 ♪'Mia&Sebastian's Theme'. 세바스찬은 미아를 떠올리며 어느새 사랑과 꿈 모두를 포기해버린 자신을 깨닫고 미아에게 달려간다.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다시 찾은 것처럼.
하지만 절망적인 연극의 결과에 미아는 좌절해버리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채 떠나버린다. 마음이 너덜너덜해져 꿈을 이룰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을 때도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엔 다시 세바스찬이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우린 어디쯤에 있는 거지? 어떻게 해야 돼?"
"흘러가는 대로 가보자."
"언제나 자길 사랑할 거야."
오디션을 마치고 미아와 세바스찬은 서로의 꿈을 더 이상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 꿈과 사랑 둘 중 하나를 제대로 이루는 것조차 버겁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결국 서로에게서 멀어져 갈 것임을 느끼고 있지만 각자가 그토록 원하던 꿈에 최선을 다해 매진하기를 약속하며, 서로를 위해 가장 밝게 빛을 낸 서로를 사랑하며 떠나간다.
그리고 다시 Winter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둘은 각자의 꿈을 이뤄낸다. 유명한 여배우, 그리고 정통 재즈 피아니스트. 두 사람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단 1년 동안에도 수없이 넘어지도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한 둘이기에 꿈을 위한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렇기에 꿈을 이룰 만큼 각고의 노력을 한 두 사람은 함께 하고 있지 않다.
라라랜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꿈을 꾸고 이뤄가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꿈을 꾸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미아가 중요한 오디션에서 꿈을 꾸는 많은 이들을 기리는 ♪'Audition'을 부른 이유도 그 때문일 거다. 이 노래를 듣는 모두가 힘들어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마음으로.
우연한 기회로 세바스찬이 운영하는 'Seb's'에 방문하게 된 미아. 세바스찬은 "Welcome to Seb's."라고 인사하며 두 사람의 테마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너와 내가 재즈바에서 만났을 때부터 서로를 사랑했다면?
키이스의 영입을 끝까지 거절했다면?
1인극이 대성황을 이루고 그곳에 우리가 함께였다면?
.......
세바스찬은 '그때 그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영화 같은 상상,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꿈보다 꿈같은 상상들을 연주를 통해 펼치며 미아에게 전한다. 그리고 이런 꿈같은 상상은 현실과 대조되어 가슴을 더욱 먹먹하게 만든다.
마지막에 둘은 서로를 향해 웃어 보이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를 향해 가장 밝게 빛났어. 고마워. 언제나 사랑할게."
쌉싸래한 맛을 느끼며 영화가 끝이 났다. 꿈과 사랑을 따로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 두 남녀의 영화 속 이야기가 긴 여운을 남긴다. 잠자리에 누운 지금, 낭만적인 꿈 하나는 계속해서 가슴에 품고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노력하며 한걸음 한걸음 내 발길이 가는 대로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가다 보면 나 역시 이루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