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펜슬 스커트 Dec 09. 2019

비정규직 계약 연장 사건

40대 직장인, 엄마 그리고 여자의 사건들

순간의 선택 그리고 오래 남는 무거운 꼬리표


'여러 가지 기본적인 시스템 사용 지원과 단순 반복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 회사에서는 비정규직 계약직 사원을 채용한다. 유통업종에서도 그런 단순 반복 업무가 많기 때문에 우리 회사에서도 비정규직 계약직 사원 채용이 빈번하게 있다.


팀원 신규 충원을 위해서 채용 면접을 많이 진행하게 되는데, 유독 마음이 무겁고 안타까운 것이 비정규직 사원 채용 때이다. 


어리고 보송보송한 아이들이 우르르 4-5명씩 면접실을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초대졸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력서는 짧고 가볍고 경력은 딱히 인상적이지는 않다. 


경력 위주 자기소개를 돌아가며 시키고 이력서에 있는 경력 사항 중심으로 개별 질문을 한다.


몹시 긴장한 아이, 회사에 엄청난 기여를 할 것이라며 대단한 포부를 준비해온 아이, 아직 학생 같은 아이 등,  

다양한 삶의 이력을 가지고, 각자 나름의 인생 스토리가 있는 멋진 우주들이 내 앞에서 2년의 짧은 기간 동안의 '단순 반복 업무'를 직업으로 보장받기 위해서 긴장하며 앉아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을 채용할 때는 인력 소싱회사에 의뢰를 하고 인력 소싱회사에 등록된 인력 pool 중 원하는 요건에 맞는 인력을 위주로 해서 적게는 5명 많게는 10명까지 이력서를 보내온다.


3명에서 5,6명가량 이력서를 추려서 면접 날짜를 잡으면 이렇게 합동 인터뷰가 성사되는 것이다.


비정규직으로 경력을 시작한 친구들은 2년간의 짧은 계약기간이 종료되면 회사를 떠나야만 하고 또 비슷한 계약직으로 다른 직장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운이 좋다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일도 있지만, 대게 계약직으로 여러 회사를 거치다 사회경력을 마감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주로 유통 운영 업무라 면접 보러 오는 친구들은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대략 이력서 상으로만 보이는 그녀들의 궤적을 유추해보면, 

고등학교 졸업 이후 일단 대학교까지는 무념무상으로 다녔을 것이고, 그 이후 본인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기회와 시간도 부족한 채로 경제활동을 시작해야 했을 것이다. 혹은 원하는 일이 있더라도 맘대로 되지 않았을 수 있기 때문에 마지 못해 비정규직 계약직으로 경력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벼운 시작은 '비정규직'이라는 끈질기게 따라붙는 떼기 힘든 꼬리표를 그녀들에게 달아주었을 것이고, 그렇게 꼬리표는 점점 무거워지며 직장에서의 신분 차이를 만들어내게 된다.



일을 대하는 태도와 성실함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평가받을 수 없다. 


내가 입사했을 때부터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었던 한 친구가 있었다.

내가 팀장이 되면서 이전 팀에서 업무가 애매해진 그 친구를 팀원으로 데리고 왔다. 

다른 팀에서 팀원을 데리고 오는 과정은 항상 녹녹하지는 않지만, 역시 비정규직이니까 전 팀에서는 이 친구를 탐내서 잡아둬야 할 필요도 없고, 누구도 비정규직의 커리어 패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이 주는 긴장감으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워낙 태도가 좋고 성실한 그 친구 덕에 팀의 분위기도 나날이 좋아졌다. 게다가 스마트하기까지 해서 참 기특하고 고마운 아이였다.


비정규직 인력이 유독 안타까울 때가 상대적인 비교를 어쩔 수 없이 당하게 되는 때이다. 그리고 비정규직의 꼬리표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무거워진다.


비정규직으로 잔뼈가 굵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좀 있는 경력자중 여러 가지 업무들을 경험하면서 업무 처리를 꽤나 잘하는 인력들이 있다. 그런데 신입 공개 채용을 통해서 신입 정규직이 유입되면 그녀들은 더더욱 초라해 보인다. 왜냐하면 신입 정규직 대비해서 할 수 있는 일도 많고 눈치도, 센스도 좋지만 월급이나 처우에서는 비교도 안될 악조건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입들은 나이가 어리고 일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지만, 비정규직 경력자들 위에서 업무를 지시하는 위치가 된다. 


이 친구도 그런 과정들을 겪어가며 2년을 지내왔고, 탁월한 성실함과 긍정적인 태도를 인정받아 파견직 비정규직에서 우리 회사의 계약직으로 다시 2년의 계약을 연장할 수 있었다.

회사의 계약직은 정규직 전환이 가능한 자리로, 이 친구에게는 직업 인생에서 큰 전환을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누구를 위한 정규직 100% 인가?


마침, 정권이 바뀌고 새로 취임한 대통령은 대기업들 중심으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장려하였다.

나라의 정책 변화와 무관하지 않은 우리 회사에서도 대표이사가 회사의 인력을 '정규직 100%'로 구성하겠다고 발표를 하고 대대적인 언론 홍보도 이루어졌다.


우리 회사에서 사용되는 '정규직 100%'라는 말의 의미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이상 비정규직을 채용하지 않을 것이며, 비정규직의 계약기간도 연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사 방침으로, 

현시점에서 비정규직인 인력들에게는 곧 닥칠 퇴사를 예견하는 의미였다.


우리 팀의 계약직 에이스도 2년까지 연장 가능한 계약기간 중 1년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가 되었고, 계약 만료 1년은 금세 돌아왔다. 


혼자 정의로운 척하지 말죠.


인사팀에서 '계약직 사원 평가서'를 보내왔다. 계약직은 1년마다 업무평가를 받게 되고, 평가에 따라 계약 연장이 결정된다고 했다. 평균 80점 이상이 되면 계약 연장이라는 인사팀 담당자의 말을 들었다. 

직속 팀장이었던 나와 본부장의 평가가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인사팀에 평가서가 제출되었다.


인사팀 담당자가 미팅을 요청해왔다.


인사팀 앞 '고충처리위원회'라는 무시무시한 간판이 달려있는 평범한 회의실에서 그는 '연장 가능한 평가를 주시기는 했는데 회사의 방침상 연장이 어렵다. 평가를 수정해주실 수 있냐'는 얘기를 어렵사리 꺼냈다.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났고 주체할 수 없이 흐느껴 울었다.

우리 회사에서 3년이나 비정규직으로 근무를 하며 나이도 들고 경력도 쪼개져버린 그 친구를 생각하니, 게다가 갑작스럽게 계약 만료로 백수가 되어 급하게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할 처지를 생각하니 너무나도 슬펐다. 


그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아마 꽤나 당황했을 것 같다.

계약직으로 커리어를 출발했지만, 충분히 회사에서 자신의 몫을 할 수 있는 인력들에게 현실은 참 가혹했다.


평가를 수정해달라는 요구가 너무 부당하다 생각하여 자리에 온 다음 인사팀장과 통화를 했다.

나는 열을 올렸다. 

"이게 문재인 정부가 최근 장려하는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인가요? 평가를 수정하라니, 그럼 계약 연장을 안 한 것처럼 만들기 위해서 평가를 조작해야 하나요?"

"----"

"팀장님, 제가 말씀드린 게 듣기 불편하신 모양입니다."

"네,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네요. 회사도 경영 방침이 있는데, 혼자 정의로운 척하면서 못하겠다고 하시니까.. 알겠습니다."


인사팀장이라는 사람은 본인의 지시에 순순히 따르지 않고 열을 낸 나의 반응에 내내 불쾌해했고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혼자 정의로운 척을 하지 말라니...

내 자녀가 이런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가까운 나의 사랑하는 사람의 일일 수도 있다.

지금 내가 따뜻한 정규직의 울타리 속에서 법의 보호를 받으며 매년 잘릴 걱정이 덜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할 지라도, 이런 것들은 남의 일 같으면 안 된다.

나는 정의롭지도 않고, 정의로운 척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 나에 대한 인사팀장의 평가는 부정적이 되었다. 


나는 본부장에게 이 일을 보고했다. 본부장은 다행히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고, 우리의 평가를 수정해야 한다는 얘기를 전했을 때 함께 분개했다.

본부장이 온몸으로 막아준 덕분에 우리 팀 계약직 에이스는 1년의 계약 연장이 가능했으나 정규직 전환의 길을 원천 봉쇄된 시한부 조건이었다.


그녀는 이제 없다.


그녀는 비정규직의 신분대로 계약기간이 끝났다. 

그냥 그것으로 그녀가 해왔던 일들은 누군가의 몫이 되었고, 빈자리는 곧 표시가 나지 않게 되었다.


조직에서 누군가 떠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떠난 사람의 흔적은 바람이 한번 훅 하고 불면 사라져 버리는 모래사막에 새긴 사랑의 약속처럼 곧 잊힌다.


나는 운 좋게도 비정규직으로 경력을 시작하지 않았기에 시한부 근무의 아픔을 직접 겪지는 못했다.

그러나 내 주변 누군가의 일일 수도 있고, 한참 사회인으로서 경력을 쌓아나가야 하는 어리고 꿈 있는 내 후배들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도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는 우리 회사 비정규직 동료들의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이 편치 않다.


우리 팀 에이스였던 친구가 새로운 조직에서 정규직으로 인정을 받아 안정적인 회사생활을 하기를 바란다. 

앞으로 내가 또 비정규직 계약직을 채용하게 된다면 나는 그 친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사실, 정의로운 척을 하지는 않았지만 뚜렷한 답도 낼 수 없는 나의 위치가 답답하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내내 고민할 것 같다.

나와 있었던 시간들이, 그들이 앞으로 커리어를 설계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도록 보듬어주고 코칭하고 또 함께 뛰어주고 싶다. 내가 그들이 피우는 민들레 꽃의 강아지똥이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본다. 

이전 03화 그녀는 내 20년 후 직장 선배님일지도 모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