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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슬 스커트 Jan 13. 2020

나는 가장이다.

세상의 모든 가장은 위대하다.

나는 우리 집 가장이다.


가장(家長)을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보니 네이버 사전에 나온 가장의 의미는 이렇다.


* '가장'의 검색 결과 : 네이버 사전 *          

가장 (家長)  

[명사]  
1.  한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  
2.  ‘남편’을 달리 이르는 말.  
[유의어]  가구주,  남편,  호주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나는 나를 가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한 가정을 혼자 이끌어 나가지도 않고, 남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 늘 '가장이다'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이유, 특히 가장 중요하게는 생계를 이유로 해서 집의 수익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고,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와도 밥벌이를 해야 하는 직장 생활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가장의 숙명이 그런 것 아닐까?

그만두고 싶어도 못 그만두는 것. 왜냐하면 돈을 벌어야 해서.

'나는 가장이다'라고 스스로 소리 내어 말해보면 그 무게감과 책임감이 실감 난다.


이쯤 하면 '남편은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백수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남편은 프리랜서 프로그래머 일을 하고 있고, 집에서는 주로 식사 당번이면서 아이와 놀아주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프리랜서 프로그래머도 일반 직장인과 똑같이 9시에 출근하고 6시 넘게까지 일을 한다.

다만,  프로젝트에 따라 일하는 곳이 바뀌고, 프로젝트의 기간에 따라 월급 받는 개월 수가 달라진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내가 가장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벌이가 일정치 않을 수 있는 남편에 비해서 정기적인 수익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나는 정규직이기 때문이다.


정규직 조직 생활, 내가 해보니.. 누군가에게는 시키고 싶지 않은 일.


조직 생활의 진면목을 보기 전인 사원, 대리 시절.

마치 이 회사는 내가 다 이끌어가는 것 같았고, 회사는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용감하게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도전하고 또 실패하더라도 얻는 것이 있다는 이론적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조직 생활'이 아니라 '일'만 하고 있었던 때가 있었더랬다.

 

그런 어린 시절에 차장님, 부장님들 그리고 우리 팀장님을 보면,  

가끔은 '왜 일을 저렇게 밖에 못할까' 싶기도 했고,

'너무 비겁하다'싶게 업무를 회피하는 모습을 볼 때 실망도 많이 했었고,

상사의 부당한 비아냥거림에도 상사의 비위를 맞추고 해 달라는 걸 다 해주며 꾹 참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능력이 없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이제 내가 그들의 위치에 와보니, 왜 그때 그들이 그렇게 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이기 때문에 함부로 내질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가정을, 본인을 믿고 살아가는 가족들을 지켜내야 하기 때문에, 가장은 나이가 들수록 조직 내에서 몸을 사리게 되고, 비겁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공하기 위해서 보다는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나도 몹시 다혈질이고 여전히 성질을 잘 못 이겨 일이나 관계를 그르쳐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나 또한 조직 생활을 하면서 모난 부분들이 자의와 타의에 의해서 조금씩 마모되어 무뎌지며 둥글어지고 있다.


스스로 가장이라 칭하지만, 나는 내가 그만두면 밥벌이를 백업해줄 남편이라는 존재가 있다.

내가 관두면 그가 좀 더  긴장하고 프로젝트 안 끊기게 열심히 하겠지.


그러나 더러 많은 가장에게는 백업을 해줄 대상이 없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이 커가고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게 되면 주로는 엄마가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하기 때문에 이때부터 가장은 집의 수익을 혼자서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 생활에서 참아내야 하는 것들이 많아진다.




나는 조직 생활이 내 맘대로 되는 일보다 내 맘대로 안 되는 일이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고, 더럽고 아니꼬워도 참아내야 하는 상황도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40대만 되어도 기업에서 퇴직 압력이 강하게 들어오기 때문에 어떻게든 매달려서 버텨내려면 자아실현이란 물 건너간 옛날 옛적 얘기이고, 무너진 자존심 조차 부여잡을 수가 없다.


프로젝트 기반으로 일을 하는 프리랜서 프로그래머의 세계는 경험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나는 남편이 조직 내에서 그렇게 타협하고 굽신 거라고 참아내는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게다가 일반적인 직장생활을 했다면 이제 곧 퇴사로 내몰릴 나이가 된 남편이 회사에서 맞이하게 될 쓸쓸한 말로는 경험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이미 그렇게 길들여진 사람인 데다 남편보다는 더 사회생활에 맞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럭저럭 스트레스 좀 덜 받고 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남편은 누군가로부터 지시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고, 사회생활을 위해서 싫지만 어울려야 한다는 것. 나보다 업무 역량이 떨어지는 누군가가 나보다 더 먼저 승진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정규직 조직 생활은 우리 집에서 나만 담당하면 된다.


외벌이 가장을 꿈꾼다.


12월 말에 프로젝트가 끝나고, 남편의 짧은 자체 휴가가 오늘로서 끝이 났다.

짧건 길건  간에 프로젝트가 종료되고 남편이 다음 프로젝트를 구할 때까지 쉴 수 있는 기간이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럽다.

정규직인 나는 늘 익숙한 환경에서 일하기 때문에 낯섦에 적응해야 하는 스트레스는 크지 않다.

그러나 프리랜서인 그는 프로젝트마다 적응을 해야 할 것이다.

정규직으로서 보장받는 법정 휴가도 없다.

그렇기에 프로젝트 중에는 쉽게 쉴 수도 없는 것이다.


그가 우리 집의 생계를 혼자 책임졌다면, 중간에 브레이크 없이 프로젝트를 쉼 없이 했어야 할 것이다.




그가 쉬는 동안 마침 아들의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엄마보다 밥을 더 살뜰히 잘 챙겨주는 아빠 덕에 아이는 겨울 방학 초반에 집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게다가 아빠가 워낙 잘 놀아주니까 하루하루 즐겁게 학원도 갔다 오고 재미나는 외출도 할 수 있었다.


남편이 쉴 때, 나는 서툴게 운영하고 있는 우리 집 가계가 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적게 벌어와도 정기적인 수익이 있어서 계획적인 투자와 소비를 할 수 있는 것이, 지속 가능한 가정을 경영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이다.

지출이 뻔한데, 남편이 쉬어버려서 수익에 차질이 생기면 모아둔 돈을 헐어 써야만 한다.


그러나 남편이 쉴 때, 나는 마음이 한결 가볍다.

뭔가 내가 휴가를 맞이한 기분도 들고, 끊임없는 집안 일로 남편이 바쁜 걸 보더라도 그가 좀 사람 스트레스는 덜 받겠지 싶어서 안심이 된다.


게다가 아이도 학교나 학원에서 돌아오면 집에 반겨줄 누군가가 있으니 훨씬 힘이나 보인다.


그래서 나는 사실 외벌이 가장을 꿈꾼다.

내가 남편 몫까지 벌 수 있으면 모두가 좀 더 편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빠는 나가서 돈을 벌고, 엄마는 집안 살림하며 아이들을 돌보고.

이런 전통적인 성역할은 의미가 없어진지 꽤 된것 같다.

가족내에서 자기에게 맞고 자기가 잘하는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족이 행복할 수 있으면 누가 집안일을 하고 누가 돈을 버는 것이 뭐가 중요할까.




앞으로 내려갈 일만 남은 회사 생활, 그 이후에 내가 어떤 준비를 하면, 우리 집이 좀 더 안정적일 수 있는지 고민한다.


최근 본부장과 실장 몇몇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계약직 임원들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것은 곧 퇴사를 의미한다.


갑작스럽게, 아무 준비도 없이, 실업자가 된 가장들은 어떤 마음일까..


갑작스러운 실업이 없는 외벌이 가장이 되기 위해서는 온전한 나의 일이 있어야 한다.

월급 받는 일이 아니라 내가 경영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그걸 준비하는 동안 내게 승진해서 계약직 임원이 되는 불운(!)은 없어야 한다.

최대한 정규직으로 몸을 낮추고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직장 생활의 균형을 지켜야 한다.


한때는 유리 천장을 뚫고 조직의 성장을 이끄는 핵심인재가 되고 싶은 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족을 위해서 자기를 낮추고 한없이 버티던, 내 선배들과 같은 꿈을 꾸고 있다.


세상의 모든 가장은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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