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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슬 스커트 Dec 04. 2019

그녀는 내 20년 후 직장 선배님일지도 모른다.

40대 직장인, 엄마 그리고 여자의 사건들

잘 지냈어요? 2년 2개월 만이네.


화장실에서 우리 층 청소 담당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분을 처음 본 게 회사가 이 건물을 신축해서 이사 온 직후였던 것 같다. 

3개월에 한 번씩 담당 구역이 로테이션된다고 하셨는데, 2년 2개월 만에 그분이 다시 내가 근무하는 층의 청소를 맡게 되신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우리가 언제 만났었던지 기억하고 있었다. 


"잘 지내셨어요?"

"뭐, 이제 적응되었죠. 처음에 9층 맡았을 때는 사람도 많고, 쓰레기도 많고.. 어떻게 하는 줄도 몰라서 고생 좀 했는데 이제는 오래됐으니까."


집 청소가 매일, 매주 필요한 것처럼, 사무실도 근무공간으로서 유지되기 위해서는 매일 청소가 필요하다.

우리 회사처럼 큰 건물을 쓰는 회사라면 건물관리와 청소는 대부분 용역을 맡긴다.


그녀도 그런 용역업체에서 파견 나와 청소일을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다.



팀장님 참 늘 한결같아요. 집도 얼마나 깨끗하게 하고 살까.


나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청소해주시는 여사님들이 특히 내게 잘해주시는데 바로 앞전에 우리 층을 담당하셨던 여사님이 화장실에서 만났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옷 입기도 좋아하고 꾸미기도 좋아해서 출근할 때 공을 꽤 들이고 나오는 편인데 그런 모습이 아마 좋아 보이셨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는 순간, 항상 정돈되지 못한 우리 집이 생각나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솔직히 나는 내 몸 하나만 쫙 꾸밀 줄 알았지, 지저분한걸 잘 참는 사람이고 살림은 내 인생처럼 그저 let it go 하고 있다.


늘 내 꾸미기에 바빠서 일어나 침대 정리도 못하고 허둥지둥 출근하고, 집에서 사용하는 그릇은 신혼 때 엄마가 장만해준 것들과 홈쇼핑에서 이것저것 사면서 받은 사은품들이 전부인 비루한 살림이다.

청소? 음.. 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씩 청소해주시는 여사님이 오시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나의 외모만 보시고 모든 걸 너무 후하게 점수를 주셔서, 감사하면서도 마음은 좀 편치 않았다. 


"사무실에서 일하니까 아무래도 좀 깔끔하게 입는 게 좋죠? 난 너무 편하게 입은 분들 보면 '일하러 나온 거 맞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사님, 그냥 돈 벌어야 되고 바깥에 출입해야 되니까 화장도 하고 옷도 챙겨 입고 나오는 거예요. 사실 별거 없어요. 정말' 

이렇게 말하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최근 청소를 하시는 여사님들을 뵈면, 젊으셨을 때 참 이쁘셨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분들도 많다.

그녀들도 20-30년 전에 나처럼 꽉 맞는 스커트를 입고 누군가 치워준 사무실 자리에 앉아서 서류 작업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번 달부터 다른 층에서 일해요. 요즘 안 보여서 인사도 못하고 내려왔네.


나를 칭찬해주시던 여사님을 회사 로비에서 마주쳤는데, 이번 달부터 로테이션되어 다른 층에서 근무하게 되셨다고 인사를 못했다고 말씀을 하신다. 


너무나도 다정하게 본인이 일하고 있는 층에 대한 이야기며 지금은 어딜 가는 중인지 등 최근 근황을 말씀을 해주시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녀에게 나는 무슨 의미였을까? 작별 인사가 필요한, 같은 공간에 함께 근무하고 있는 직장동료였을 것이다.

나에게 그녀는 무슨 의미였을까? 나에게 그녀는.. 그냥 청소해주시는 분. 딱히 사무실의 배경이나 비품처럼 존재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내 20년 후 직장 선배님일지도 모른다. 


나는 따뜻한 그녀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청소'라는 일이 주는 가치를 넘어서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느끼는 '직업인'을 보았다.

그녀들은 직업인이었고, 같은 공간에 있는 우리는 그녀들의 동료인 것이었다.

그렇기에 안부가 궁금하고 자기 얘기도 전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내가 지금은 배경처럼 생각하는 청소라는 일이 20년 후 나의 직업이 될 수도 있다.


깔끔한 차림으로 보고서를 만들고 컴퓨터 작업을 하는, 사무직으로서의 내 수명은 점점 단축되고 있다. 40대의 어느 언저리, 혹은 50대의 어느 순간에 나는 사무직으로서의 직업을 떠나게 될 운명이다.


이건 오너가 아닌 이상, 모든 월급쟁이들이 죽음처럼 맞이하는 정해진 결말이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다만 박수 칠 때 떠나는 사람, 밀리고 떠밀려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듯 나가는 사람, 어느 순간 사라진 사람 등..

그 마지막의 모습은 다를 수 있지만, 결론은 '퇴사'로 귀결된다.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이므로.. 나는 가끔 다양한 내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곤 하는데.  

퇴사 이후 사무실에서 입었던 펜슬 스커트와 7cm 펌프스를 벗고 나 또한 작업복에 두건, 장화를 신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 내게 꼬박꼬박 일을 했다는 대가로 입금해주는 월급이 있다는 것을 무기로 해서, 안하무인이 되면 안 된다.  

청소원, 계산원, 택배기사, 경비, 택시기사, 가게 점원.. 그들은 내 미래의 모습이다. 

그들도 한때는 나처럼 좀 더 팽팽한 얼굴에 분칠을 하고 잘 다려진 셔츠에 재킷을 입고 아침 7시 반에 서둘러 집을 나서던 모습이었을 것이고, 20-30년 동안은 그런 모습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우리 회사 청소 여사님들과 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동지의식이 있는, 그녀들은 내 미래 직장의 선배님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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