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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슬 스커트 Aug 04. 2020

외벌이를 꿈꾸는 직장맘의 희망퇴직 도전기 (2)

외벌이를 희망하는 가장에게도 꿈이 있고 자존심이 있다.

희망퇴직도 못하는 신분?


내가 희망퇴직 신청서를 제출했다는 것을 안 팀장과의 길고 긴 면담이 시작되었다.

그의 첫마디는 '무모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디 갈 곳은 있는지 물었다.

그런 것은 아직 준비하지 않았다고 얘기했고, 천천히 생각해보려 한다고 대답했다.


팀장은 여러 가지 얘기를 하면서 나의 희망퇴직을 극구 만류했다.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희망퇴직을 속 편하게 할 수 있는 신분 또는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보자면, 


1. 집이 2채 이상인 경우이며 희망퇴직으로 생긴 목돈으로 빚을 갚을 수 있는 사람

(일단 여기서는 부동산이 2채 이상인 게 중요하다)


2. 이직할 곳이 정해져 있어서 희망퇴직으로 생긴 목돈을 생활비로 한 푼도 사용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 


3. 남편이 튼튼한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희망퇴직으로 생긴 목돈을 부모님께 용돈으로 다 드려도 무방한 사람

(이건 실제 사례를 들어 얘기했다)


여하튼, 결론적으로 말하면 경제적으로 집 2채 이상은 있고 월세든 월급이든 배우자의 벌이가 확실한 경우가 아니면 희망퇴직은 무모한 짓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백번.


"OOO팀의 A 부장은 1번의 경우에 속하는데도 희망퇴직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냥 월급이라도 받는 상황이 나으니까."라고 하며 그는 한 손은 높이 들어 보이고 한 손은 책상 가까이로 가져가며 말했다.

"여기 위에 있는 A 부장도 희망퇴직 안 하는데, 여기에 있는 (바닥에 가까운) 배차장이 어떻게 희망퇴직을 생각할 수가 있어? 너무 철이 없는 거 아냐?"


그는 열과 성을 다해서 나의 희망퇴직을 온몸으로 말렸다.


어찌 보면 감사할 일이다. 사실 결정된 넥스트의 job도 없었고 40대 중반이라는 내 나이도 애매하고.. 어찌 보면 이러다가 직장인으로서의 커리어가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가 말려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과정에서 나는, 내 마음과 지금까지의 내 인생과 재산은 없지만 행복하다고 느꼈던 내 가족은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다.


그의 말에 따르면 흑수저로 태어나서 월급 생활자로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나'라는 계층의 사람은 희망퇴직조차 마음대로 하면 안 되는 신분이라는 것이다.



남편을 못난 남자로 만들었다는 슬픔


팀장의 적극적인 만류와 직접 인사팀장에게 전화해서 '배차장은 희망퇴직을 철회할 것이다'라는 오지랖으로 오후에 있었던 전무 미팅 때 전무는 다른 희망퇴직 신청자 면담과는 다르게 이례적으로 나를 잡았고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겠노라고 하고 면담을 마쳤다. 


'내 면을 생각해서라도 못 이기는 척하고 인사팀에 있는다고 전화해.'


희망퇴직 신청서를 제출한 철없는 못난이로 하루 종일 팀장에게 시달린 월요일이 지났다.

화요일 아침, 남편이 희망퇴직은 어찌 되어가냐고 물었고,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아, 그게 팀장이 너무 붙잡아서 아무래도 좀 어렵겠어."라고 대답했다.

남편은 "팀장이 그러면 뭐 부장 시켜준데? 아니면 팀장 승진시켜준데? 그만 못 두게 막으면 뭘 해줘야지. 딜을 해 딜을" 

요런.. 철없는 말을 했다.


"아니면 관둬, 뭐 그 회사가 딱히 잘해준 것도 없잖아. 

희망퇴직받으면 1년은 맘 편하게 쉴 수 있는 거 아냐? 

여행도 좀 다니고 좀 쉬어. 

그러고 나서 좀 재미나는 일을 해봐. 

월급 좀 적으면 어때."


우리는 이렇게 불편하면서도 답답한 대화를 마쳤다.

남편의 말도 맞다.

굳이 이렇게 종종 대지 않아도 삶은 계속되고 나는 무슨 일이든 찾아서 할 것이다.

남편은 내가 좀 앞으로 편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동안 일하느라 거의 못 쉰 나를 쉬게 해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팀장이 나의 희망퇴직을 극구 만류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남편의 직업이었는데, 프리랜서 개발자가 너무 불안정한 직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 스스로 '저는 우리 집 가장이에요.'라고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정말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나를 딱한 여자 가장으로 포지셔닝시켜 버렸기 때문에 였다.


내가 만든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 스스로 서술한 나는 '능력 없는 남편을 둔 40대 중반의 여자 가장'이었던 것이다.

나는 스스로 나를 낮춰 표현했는데,  아직 벌어야 살아가는 인생이기는 해도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

회사 그만두면 인생 자체가 와르르 무너지는 상황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내가 정말 철이 없었나.. 이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내가 남편을,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멀쩡하다 못해 훌륭한 사람이기까지 한 남편을 나 스스로, 아내를 일터로 내몬 무능한 가장으로 만든 것 같아 송곳처럼 가슴이 찔리듯 아팠다.


딱히 내세울 경제적 이력이 없는 40대는 현재의 직장을 떠나서 쉼과 또 새로운 도전을 하기 어려운 것일까.



내 인생은 누가 책임지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당시 팀장이 너무 과하게 희망퇴직을 만류했다는 느낌이 있다.

물론 나를 생각해서 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본인의 팀에서 누군가 희망퇴직을 한다는 것이 팀장으로서 

관리 미흡으로 비칠까 두려웠을 수도 있고,

 또 당시 떨어진 프로젝트를 할 적임자가 나였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희망퇴직을 하라는 남편의 말을 듣지 않고, 남으라는 팀장의 말에 따라 결국 남는 결정을 하였다. 


희망퇴직 좌절이 내내 씁쓸한 뒷맛으로 남은 것은, 희망퇴직 자체가 좌절되어서가 아니다.

내 인생의 중요한 결정이 나 또는 나의 가족이 아닌 누군가의 입김으로 좌지우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나 자신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내 인생만이 걸린 일이었기 때문이다.


희망퇴직 신청 공지가 나왔을 때 마침 코로나 바이러스가 터졌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스스로의 인생을 남이 결정하도록 맡겨버린 것 같은 느낌에 몹시 힘들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재택근무가 시작되고 모든 것이 더디 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말로 그냥 맨몸으로 회사를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은 이렇게 좀 더 이 직장에서 월급쟁이 생활을 연장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앞으로는 다시 누군가 나의 현재와 미래를 평가하게 만들고, 우리의 가족에 대해서 쉽게 말하게 만들고 남편을 무능한 남자로 전락시키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온전히 나 스스로 선택의 순간에 단호한 결정을 할 것이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질 것이다. 



외벌이 가장도 꿈꿀 수 있다. 


희망퇴직을 하는 것이 꿈과 관련이 있을까..

누군가는 꿈을 찾아 퇴사를 하지만 우리 나이에는 더러 등 떠밀려 원치 않은 퇴사를 하게 된다. 

원치 않는 퇴사는 꿈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퇴사 그리고 직장에서의 영원한 은퇴는 40대가 지난 직장인 누구에게나 남일이 아닌 일이 된다.

언제 조직개편이 되어 내쳐지거나 하고 있던 일의 보직을 잃어버리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런 나이의 외벌이 가장은 정말 회사가 나를 진절머리 치며 거머리처럼 떼 버리려고 온갖 수모를 주어도 꼭 붙어있어야 하나?

'버티는 자가 이긴다'

'젖은 낙엽처럼'

..


점점 경쟁력을 잃어가는, 내가 누구인지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명함의 회사 이름이 전부 인, 

무수한 중장년 직장인들에게 퇴사는 두렵지만 죽음처럼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일 수밖에 없다.


외벌이 가장도 꿈꿀 수 있어야 한다. 


내 것이 아닌 직장생활은 길어야 60살 전에 끝나기 때문이다.

마음이라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생산활동이 어려우면 소비활동이라도 습관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은퇴 이후 어떤 희망을 품느냐,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느냐 이다. 


그것을 내가 자발적으로 준비할 것인가, 남들이 준비해줄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희망퇴직도 못하는 신분은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외벌이 가장이라도 여전히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

나중에 후회하는 날이 오더라도 결정은 온전히 내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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