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너무 잘했다.
가족 중에 암 환자가 생기면 반드시 한 명이 주 보호자가 된다.
책임감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갈 수 없다.
굳이 비유하면 조별과제와도 비슷하겠다.
친척들이 와서 한 마디씩 거들 수 있지만 그 말들을 공격으로 여기지 않으려면
그냥 팔 걷어붙이고 내가 하고 내가 책임지면 된다.
많이 보고, 곁에 있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냥 해낼 뿐이다.
그게 좋다.
나는 그게 좋았다.
밥을 챙기고, 병원을 차로 모시고 가서 의사를 만나고, 처방전을 받아서 봉지 한아름 약을 지어 오고, 진료비를 납입하고,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밤에 이상하다 싶으면 쪼르르 달려가서 체크하고. 엄마와 형의 건강이 도저히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내가 주 보호자가 되기로 선언했다.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 엄마랑 형에게는 상의할 때 말하겠다고 하고 팔을 걷어붙였다. 이 과정에서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명분이나 의무가 아니었다. 나의 인생의 일부가 사라지는 일이다.
너드 같다면 너드 같고,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다.
아버지를 돌보는 일이 그랬다. 시간-자원 투입 최적화, 성과 정량화, 감정 배제하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집중하기, 안 됐을 때 다음 액션의 빠른 도출. 혈압은 하루에 네 번씩 네 번을 쟀고 노트에 적은 후 엑셀에 입력했다. 편차가 네 개 중 편차가 제일 큰 입력값은 결측/이상값으로 간주하고 버렸다. 아버지 식사량을 체크하고 내가 깨어 있는 동안은 수면시간을 한두 시간 단위로 기록해 두었다. 혈압을 재면서 열도 쟀다. 전자식 체온계도 있었지만 체온을 잰다는 핑계로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린 앞머리와 이마도 자주 만져드렸다. 아빠는 몰랐을 거다. 머리를 쓰다듬거나 발바닥을 만져드리고 싶었는데 만져드리면 잠이 깨니까 그걸 핑계로 아버지 앞이마를 더듬더듬 만져드렸다.
1~2주 간격으로 시작된 긴 항암 마라톤의 지휘자인 분당서울대병원 김유정 교수를 만나는 날에는 부작용 발현 정도와 함께 정리된 A4 용지를 인쇄해서 빠르게 보고했다. 물론 특이사항이 없으면 선생님 말씀을 더 듣기 위해 스킵, 5분 남짓 안 되는 그 시간이 앞으로의 한 달을 결정한다. 녹음기까지 동원했다. 우선순위 1~5개 초 핵심 질문을 준비하고 시간이 없으면 이것도 스킵
서울대병원 암센터를 그렇게 서너 번 가게 되니 요령이 많이 생겼다.
주차를 먼저 하고 채혈실 대기표 뽑고, 엑스레이 찍고, 지하 빵집에서 아버지가 좋아하실 달달한 음료를 사드렸다. 아버지는 파리바게뜨가 언제나 최고라고 했지만 사실 맛은 뚜레쥬르가 좀 낫다. 뚜레쥬르에서 사 와도 파리바게뜨라고 말하시면 더 맛있게 드셨다. 그중에서 야채 고로케를 가장 좋아하셨다. 외래 진료가 시작되는 암센터는 아홉 시에 열지만 채혈은 일곱 시에도 가능해서 피 뽑고 지하 통로를 걷거나 뒷산으로 이어지는 오솔길도 아버지와 걸었다. 항암 주사를 오래 기다려야 하면 지하에 있는 한식당에서 순두부찌개를 사드렸다. 항상 국물에 밥까지 비벼서 맛있게 드셨다. 생각하면 모두 아버지와 했던 담백한 데이트 시간이었다. 외래 병동에서 대기할 때 보면 아들이 보호자로 오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딸이나 며느리가 가장 많았는데, 아버지는 이것도 좋아하셨다. 누굴 닮아 그렇게 무뚝뚝 한지 재미 하나도 없는 아들들이었지만, 이때만큼은 결혼 후에 학습된, 또는 잠재된 섬세함을 아낌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자식도 없는데, 아버지를 애기라고 생각하지, 죽이 뜨거우면 호호 불어서 입에도 넣어드리면 되지.
3월 아버지와 나란히, 4월에는 팔뚝에 힘을 실은 팔짱을, 5월에는 아버지가 자존심 상해하지 않을 부축을, 6월에는 휠체어를 밀면서 서울대병원 곳곳을 다녔다. 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직장도 뒤로 하고 실질적인 주 간병인이 되니 미안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셨지만 "똑똑한 둘째"가 엘리트 "서울대 의사 선생님"과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대화를 하고, 의학적 소견을 "제대로 해석해서" 이해시켜 준다고 생각하셨는지 안심하고 좋아하셨다.
가장 일반적인 항암 요법의 부작용은 식욕 상실이다.
도저히 삼킬 의욕이 없는 사람에게 고기 한 점이라도 더 먹어보라고 하는 일은 고역이다. 엄마는 항암치료로 입원하는 전날 저녁은 무조건 소고기를 한가득 사 오셨다. 걸어서 15분 넘는 정육점에 다녀오면 엄마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나는 씩씩하게 고기를 구워서 아버지 접시에 툭툭 올려놓으면 그제야 먹기 시작하셨다. 한 점이라도 더 먹으라고 엄마는 계속 권하면 아버지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또 소리를 지르셨지만, 내가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 그냥 하나만 더 드세요. 진짜 하나만 더 드세요. 진짜 진짜 마지막!"
그럼 그냥 묵묵히 집어 드시고 마셨다. 우리 집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특권 같은 일이었다. 엄마는 내 말만큼은 아버지가 그래도 들으시니 마음을 놓으셨다. 항암주사 직후에도 며칠간 입맛이 돈다. 이때가 영양을 보충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또 소고기 왕창 사다가 굽고 찌고 삶고 가족 중에 나한테 만큼은 인상을 찌푸리시지 않는다는 특권을 이용해서 밥그릇 위에 올려드리고 한 개라도 더 드시라고 재촉했다. 비빔국수도 삶아드리고, 한밤에 출출하시다고 말이 나오면 신나서 가래떡을 잘게 잘라 구워다 꿀에 발라서 입에 넣어드리기도 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전복죽도 성시경 동영상 보면서 했는데 꽤 괜찮았다.
또 다른 항암 부작용은 딸꾹질이었다.
딸꾹질은 한번 딸꾹이 아니라 1분 넘게 연속으로 부엉이 우는 소리처럼 꾹꾹 거리셨는데, 이건 도저히 잠을 잘 수 없게 만드는 괴로운 부작용이었다. 딸꾹질 멈추는 약도 자꾸 먹으니 효과가 떨어져서 얼음을 잘게 부수어 찬물에 넣어서 마시게 해 드렸다. 비스듬히 누운 앙상한 아버지의 몸을 일으켜서 마시게 해 드리면 시원하다며 좋아하셨다. 얼음도 와그작 깨 드시는 걸 보면 괜히 내 마음도 좋아졌다. 가끔씩은 엑설런트 아이스크림을 칼로 4등분 해서 입에 넣어드리면 잘 드셨다. 영양 섭취가 절대적이라 나름 괜찮은 요법이었다.
새벽까지 깨어 불 꺼진 거실에 있으면, 엄마, 아버지, 형, 세 사람을 내가 지켜주는 불침번 같아서, 지금 건강한 나의 몸이 닳아져서라도 형의 재활이 더 많이, 엄마의 지병이 좋게, 아버지의 살 수 있는 날이 더 길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나지막이 기도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내가 한 인간으로서의 완전한 자각을 가진 이후 흘려왔던 눈물보다 이때 쏟았던 눈물이 몇 배는 많았을 것 같다. 갑자기 아버지를 먼저 잃어본 남자 친구들을 떠올려봤다. 그들도 이렇게 울었을까?
아버지는 임종 전 면회 오신 교구 목사님께 말씀하셨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입관 예배 때 듣고, 터지는 눈물은 참아내고, 한참 뒤에서야 혼자 폭발하듯 흐느꼈다.
"우리 작은 애가 독일에서 슈퍼맨처럼 날아와 줘서 평생 받을 효도를 다 받았습니다."
나는 아직도, 심지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말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에서 뜨거운 기운이 복받쳐 와서 붉어지는 눈시울을 멈출 방법이 없어 곤란하다.
이렇게 담백하게 쓰지만, 간병과 정신적인 부담이 극도에 달했던 그날들의 최고 정점에서 나는 나에게 다짐했다. 이 시간이 너무 괴로워서, 내 인생에서 앞으로는 아내를 제외한 어느 누구의 생로병사에 관여하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보고 싶어 하지 않겠노라고.
그렇지만, 결국은 돌아보니, 그때 쏟아버린, 앞으로도 찔끔찔끔 흘릴 눈물을 충분히 지불했기에 나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 너무 잘했다. 아버지도 너무 잘하셨어요. 우리 모두 끝까지 너무 잘했어요"
그래 나 정말 잘했다.
태어나서 가장 잘 한 일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세 번째 문장은 병원에서 임종 소식을 듣자마자 시신을 인도하러 다시 달려가기 전에 엄마와 형에게도 한 말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너무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