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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인 Feb 06. 2023

다시 나의 이야기로

알 수 없지만 뚜벅뚜벅 그리고 씩씩하게

독일로 돌아왔다. 동화의 나라다.


초록색 들판, 정돈된 나무와 숲, 깜빡이 켜면 느긋하게 양보하는 차분한 사람들, 냉습한 날씨와 매일 아침 당연하듯 자욱히 깔리는 안개, 아파트 밖에 모르는 한국 유치원생들이 생전 본 적도 없으면서 도화지에 그리곤 하는 빨간 지붕, 창문, 연기나는 굴뚝의 집. 지구별 안에 9시간의 차이 밖에 안나는 곳이건만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만큼의 신비로운 감정을 느꼈다.


다시 업무로 복귀했다. 동료들의 인사도 담백하고 담담하다. Mein herzliches Beileid. 격렬한 포옹과 위로 대신 각자의 슬픔 그대로 흘려보낼 수 있게 짧은 인사와 침묵으로 대신해 준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창밖을 보면,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은 동일했다. 하늘을 보고, 구름사이로 새어나오는 햇살만 봐도 살아있음에 감사해. 현세,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는 인식의 세계는 아버지의 서사로 다시 이어지곤 한다. 이렇게 좋은 세상을 하루라도 더 배우면서 살고 싶으셨던 아버지, 투병 동행, 마지막 나날들에 대한 회한, 가족에게 어떻게 표현할 줄 몰라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한 뒷모습이 순차적으로 떠오른다. 나의 남은 삶은 마치 아버지에게 빌려온 것 같은 무거운 책임감 까지. 감사하게도 일상의 평범함은 애달픈 색깔의 상실감을 마주할 시간을 뒤로 미뤄준다. 그러나 빼곡히 채워지지 못한 일상의 빈틈은 어김없이 눈시울을 붉게 만든다.


꿈이라는 신비한 현상을 통해서라도 나는 아버지를 단 한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었다. 그렇지만 막상 그런 일이 생겨도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버지와 나는 긴 말을 나눈 적이 없으니까. 근데 아버지는 그냥 나와 같이 있는 걸 좋아하실 것 같다. 등산을 좋아하셨으니 한 번은 산에 올라가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면 지구 밖에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우주에 계시지 않을까 하는 SF적 공상에도 빠져보았다. 아버지와의 기억을 떠올리는 일이 무의미한 집착도 같고, 나의 회복에는 도움이 안되는 건 아닌지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가. 나마저 이렇게 아버지를 지우고 잊어버리면 온세상이 그를 망각할 것 같은 걱정. 도저히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에 기습적으로 맞닥뜨리게 된다. 그래 이걸 상실감이라고 하더라.  


각개전투같은 하루를 보내고 다시 밤이 찾아오면 가슴을 조이는 느낌에 숨쉬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내가 가져온 아버지 물건은 운동화 하나인데, 매일 신고 다닌다. 앞이 다 헤어지고 구멍이 났는데도 계속 그걸 신고 다닌다. 그냥 뭐라도 해보고 싶어서 하는 짓이다. 슬픔에 빠져서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건 잘 안다. 그런데 도대체 이런 성격의 감정은 어떻게 마주쳐야 하는 거지? 방법을 알 길이 없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에 기대보려고도 했고,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에 작은 기대도 걸어본다. 흙으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게 인생이라는 말에는 냉소가 나왔다. 흔한 말들로 용기를 내기에는 내가 아버지의 죽음도 그냥 흔한 죽음과 다르지 않다고 선언하는 것 만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나 정말 괜찮은 건지도 되물으며 시간을 보낸다.


아직 건강히 살아계신 부모님을 둔 친구는, 자기에게 그런 일이 생기는 건 미리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두렵다고 했다. 내게는 그것이 이미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는데도 새겨있는 기억의 잔향은 아직도 남아 있어서, 지금도 두렵다고 했다. 문법적으로 말이 안되지만 그렇게 설명할 수 밖에 없다.   


반 년 넘게 한국에 들어와서 했던 아버지와의 동행을 본 몇 분들은, 그 시간이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하며 나를 위로해 주셨다. 그러나 10년 사이 우리 가정에 닥쳐온 불행의 시간들을 온몸으로 부딪혀 지켜내지 못한 죄책감은, 가슴 깊은 곳에 침전되어 있다. 나는 생김새와 달리 다르게 여리고 섬세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을 인정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섬세한 마음을 반드시 다스려야 한다면 그 이상의 섬세함이거나 호된 냉정함이어야 할 것이다. 내가 택한 방식은 후자였던 것 같다. 내가 그린 미래를 위해 차가워야 했고, 현실적이어야 했다. 한 번씩 어려움을 토로하는 가정을 생각하면,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만을 생각했다. 아예 불가능한 일에는 뻗어나가는 마음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이 일을 겪고 주변을 보니 다양한 간병과 죽음의 형태가 내 눈에 들어왔다. 각자의 사정 만큼이나 이러한 과정을 겪는 모양도 천차만별이다. 병원에 갈 때면 병든 엄마를 부축하는 딸들만 보면 마음이 찡해온다. 암 선고를 받고 지리멸렬한 싸움을 해 나갈 주변 분들을 보면 나조차도 무슨 위로를 해야 할지, 조언을 할지도 망설여진다. 다른 지병으로 10년 넘게 요양병원이나 시설에 부모를 둔 채 언젠가 일어날 일들을 매일 걱정하며 보내는 친구들도 보았다. 길에서 머리에 쓴 모자를 보면 필연 암환자겠거니 생각하니 연민의 감정이 불일듯 일어났다가, 종래에는 인간 삶 자체가 참 덧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태어나서 그냥 우주의 먼지로 가는거다. 인생 너무 아둥바둥 살지말자" 같은 결론으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로 덮어놓고 나의 남은 인생을 무채색으로 두고 싶지는 않았다.  


가치관이 변했다.


아버지가 떠나셨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떠나신 이후의 삶도 그 전과 다름 없어야 할 이유도 반대로 새로운 방향성을 정의해야 할 의무도 없으니까. 그러나 아버지께 약속드린 "더 훌륭한 삶" 이 무엇일까에 대한 답이 의외로 쉽게 내려졌다. 그 다짐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 있는 명분이 되고 이유가 된다.  


본디 행복한 삶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기로 한 건 오래된 생각이었다. 행복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어선 안된다. 내게 주어지는 외부 자극이 행불행을 결정한다면 나의 존엄성과 유일함은 초개와 다름 없다. 대신, 살면서 느끼는 생각들을 더 깊은 깨달음으로 연결하고, 내가 존재하는, 의미있는, 가치있는 순간들을 보다 많이 경험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이것에 집착한다면 인생을 즐길 수 없다고도 생각한다.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지만 쉽게 생각하면 또 별거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내면의 생존에 위기에 있었을 때 나를 살려준 친구가 전해준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도 깨닫는다, 인간은 스스로만 성장할 수 없고 껍질을 깰 수 없다)


갑자기 직장을 두고 홀로 세계일주를 간다거나 나를 찾는다고 히밀라야로 간다는 건 아니다. 두 발을 내리고 있는 현실에서 내게 주어진 책임을 인식하고 나의 색깔을 잃지 않는 나의 인생을 훌륭하고 멋지게 살겠다는 약속이다.


산책할 수 있는 건강한 두 다리에 감사할 것이다. 내 단짝이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아꼈던 딸인 아내를 더 예뻐하고 더 자주 꽃을 선물하고 가꿔주고 희생할 것이다. 예쁜 강아지를 입양해서 사랑으로 키울 것이다. 엄마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마음고생 없이 여생을 보낼 수 있게 용돈을 더 많이 드릴 것이다.  유일한 혈육일 형을 위해 기도해주고 지지해줄 것이다. 친구들의 안부를 항상 먼저 묻고 시간을 내어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이다. 글을 쓰겠다. 나의 세대 이상을 넘기지 못할 활자 일지라도, 내 모습을 꺼내어 글로 그려보고, 나의 경험을 담백한 글로 지어서 만들어서 누군가를 위로하고 돕다가,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친구로 사귈 수만 있다면 아주 괜찮은 삶이겠다 싶다. 아버지를 보내는 과정에서 "길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보여준 온기라면 자식이 아니더라도 괜찮은 작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삶도 있는 거니까.


그러나 아직 내가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있다.


두 눈으로 똑똑히 경험한, 사실상 무작위 추첨같은, 인생 종막 선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찌질하고 잔혹하게 경험하는 인간 존엄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하다. 게다가 나의 번뇌는 끝난게 아니다. 어쩌면 잠시 미루어 졌을 뿐이다. 아버지에게 쏟아졌던 관심의 총량은 고스란히 엄마와 형 그리고 나의 아내에게로 이어질 것임에 분명하다. 나는 앞으로도 매 순간마다 동일한 책임감으로 이들을 지켜내려 격렬하게 슬퍼하고 또 씩씩하게 해나가려 할 것이다. 아버지께 드린 약속이기도 하니까.


더 나아가 나도 언젠가 똑같은 죽음을 맞이하겠지, 시력을 잃고, 감각을 잃고, 거동을 잃고... 사실 그보다 겁나는 건 내가 소중하다고 하는 인간의 존엄함, 즉 지성, 풍부한 감성의 영역, 연결됨에 대한 애착 마저도 순차적으로 때로는 즉각적으로 파괴될 때 나는 그것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과연 준비된 죽음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자의식을 놓는게 싫어서 마취도 꺼리는 내가, 인생 자체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려는 의지가 강한 나에게는 실재하는 죽음보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올까, 태어난 그 시점의 유아기적 본능만 남아있는 나의 존엄성은 어디에 있나 생각해보면 막막하다. 이 부분은 아직 답을 낼 수 없다. 다만 아버지가 투병 과정에서 보여주신 강인함이 내게도 발현될 수 있다면 나의 쓸데없이 예민한 걱정은 기우에 그칠 수도 있다는 희망도 살짝 품어본다. 


그 때가 오기 전까지는 그저 좋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 밖에는 알 수 없다. 섣불리 답을 얻을 수는 없지만 나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바뀐 것은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없다. 그러나 내 마음이 크게 바뀌었으니 우주가 변했다. 남겨주신 좋은 선물들이 하나씩 눈에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계속 아버지가 보고 싶을 것 같다.

아프고 먹먹한 마음이 아예 멈추지는 말고 지금 처럼 계속 찾아왔으면 하는 욕심까지 부려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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