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재 Sep 23. 2024

코드 유토피아

1장 의무


2087년, 합계출산율 0.02명.

대한민국 인구 13,456,621명.


세상이 변한 건 몇 년 전부터였다. 정부는 매년 줄어드는 출생률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고, 결국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인구 균형법'이라는 새로운 법령이 통과되며, 19세가 넘은 국민들은 의무적으로 국가가 주관하는 소개팅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했다.

이제는 사람을 만나는 방식이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되었다. 정부에서 지정한 날짜, 정부에서 지정한 장소, 그리고 정부에서 매칭해 준 상대. '소개팅 소집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제도는 전 국민의 일상에 스며들었다.

윤희는 긴장된 마음으로 서류를 확인했다. 오늘이 바로 그녀의 차례였다. "김윤희, 소개 대상: 박민재. 오후 5시, 양재동 스타벅스 카페 1층 23번 좌석." 더 이상 개인의 선택은 없었다. 전자시스템에 등록된 프로필에 따라 매칭된 상대를 만나야만 했다.

카페에 도착한 윤희는 문을 열기 전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이건 대체 누구를 위한 제도일까?'


윤희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카페 안은 조용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오후였지만, 윤희에게는 그 어느 날보다도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의 시선은 곧바로 24번 좌석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박민재. 전자서류에서 본 얼굴이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엔지니어 패션에 짧은 검은 머리, 마른 체형, 흔한 얼굴. 하지만 그런 단순한 정보만으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민재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자마자 눈을 들었다. 그 역시 긴장한 듯 보였다. 윤희는 침착하려 애쓰며 천천히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김윤희입니다.”


서로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은 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윤희는 이 시스템의 비인간적인 측면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인간관계라는 건 자발적인 선택과 감정의 교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국가가 이를 통제하고 강제로 주선한다니. 어쩌면 이는 감정마저 규제하려는 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이런 시스템이 처음이라,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민재가 갑작스레 말을 꺼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미세한 떨림이 묻어 있었다.


"저도 그래요. 솔직히 말해서 이런 자리 자체가 좀 불편하네요."


민재는 씁쓸하게 웃었다. "저도요. 그런데, 이런 자리를 피할 수도 없고…"


둘은 다시 조용해졌다. 주변 사람들의 소음과 카페의 배경 음악만이 둘 사이의 정적을 메웠다. 윤희는 이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다. 대체 언제부터 인간관계가 이런 식으로 강요받게 되었을까? 자유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민재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이 시스템, 왜 생겼는지 아시죠? 저출산 문제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저는 이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사람을 억지로 만나게 한다고 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런 게 가능할까요? 이런 강제적인 만남이 오히려 더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요."


민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맞아요. 저도 그런 반감이 컸어요. 그래서 처음엔 이걸 최대한 피하려고 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냥 체념하게 되더라고요. 모두가 이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윤희는 그의 말을 듣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신도 모르게 공감하는 감정을 느꼈다. 그도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만남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의무감에서 비롯된 대화는 금세 한계를 드러냈다.


"그러면, 우리 솔직하게 말하죠." 윤희가 말을 꺼냈다. "이 시스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로 말이에요.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요?"


민재는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냥 정부에 찍히기 싫어서 나왔어요. 이 제도를 어기면 벌금도 있고, 기록에도 남잖아요.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어요."


윤희는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비슷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만남이 진짜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민재는 잠시 생각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 오늘 만남은 정부에 대한 보고용으로 생각하고.. 이만 자리에서 일어날까요?"


윤희도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비록 형식적인 만남으로 그치긴 했지만, 정부주관하는 비인간적인 시스템 속에서 역설적으로 인간적인 교류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

그날 이후 윤희는 시스템에 대한 회의감이 더욱 커져갔다. 강제적인 소개팅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고, 민재와의 대화 이후로 그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민재와는 간간히 연락을 유지했지만, 그 이상으로 발전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둘 다 시스템의 희생양이라는 공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한 달 후, 윤희는 찜찜한 기분을 안고 정부에서 주최하는 '커플 평가 회의'에 참석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만난 상대와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상세하게 보고, 아니 평가당해야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회의가 일종의 감시 수단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정부는 소개팅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결혼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해 집착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진정한 감정이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 달 : ♡176쌍♡ 축하합니다!]


윤희는 구청 중앙홀 허공에 요란하게 떠다니는 홀로그램 상황판을 무심히 바라보며 적당한 대기석에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사람들은 회의실로 차례대로 들어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한 표정으로 나오길 반복 중이었다.


“김윤희 씨. 회의실로 들어가십시오. 당신의 차례입니다. 훌륭합니다. 2082년부터 시행한 우리의 인구 정책은 화성 도미토리스 연합사의 훌륭한 표본이 되었고, 당신은 이 역사적인 시스템의… ” 어느 사이보그가 윤희의 이름을 부르며 장황한 홍보 멘트를 이어갔다. 그녀는 무겁게 일어나 가볍게 그의 말을 무시하고 조금 신경질적인 발걸음으로 회의실로 곧장 들어갔다.


우드톤의 금속으로 도배된 회의실은 차갑고 건조한 분위기였다. 테이블 너머로  명의 평가관이 앉아 있었고,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앞의 VR을 넘기며 윤희를 흘끔 바라봤다. 조금 전의 사이보그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었다.


"김윤희 씨, 앉으세요. 지난번 소개팅 이후로 어떻게 지내셨니요? 박민재 씨와는 교재 중인가요?" 비교적 앉은 키가 가장 크고 중앙에 가깝게 앉은 평가관이 대뜸 질문을 던졌다. 바로 본론부터 물어볼 줄이야. 윤희는 목이 메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침착하게 대답하려 애썼다. "네, 그 후로 박민재 씨와 몇 번 더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큰 진전은 없었습니다."


이번엔 가장 멀리 앉은 평가관이 VR을 끄며 고개를 돌렸다. "박민재 씨와 관계를 더 이어나가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윤희는 잠시 침묵했다. 침묵은 정부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시스템의 요구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인간이든 사이보그든, 이 네 명은 시스템 그 자체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강제적인 만남에서 자연스러운 감정이 생길 수는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제도는 사람들 간의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기보다, 그저 숫자를 맞추기 위한 계산 놀이 불과해요."


일순간 모든 평가관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김윤희 씨, 이 제도는 국가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시스템입니다. 모두가 이를 받아들이고 협력해야 합니다." 처음 질문을 던졌던 평가관은 점점 더 격양된 목소리를 냈다. "개인적인 감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 문제에 한해서 당신은 선택권이 없습니다.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네요!"


윤희는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개인적인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니? 선택권이 없다니? 오해?! 국가가, 정부가, 이런 사람들이, 내 삶을 이토록 통제할 권리가 있는가?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윤희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었다.


“저는 동의하지 않아요!” 윤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 간의 관계는 숫자로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더 이상 이 시스템에 휘둘리고 싶지 않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평가관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윤희는 그들의 반응을 보며 자신이 한 말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후회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것이 그녀의 진심이었고, 이제 더 이상 억압된 체제로는 살아갈 수 없었다.


"김윤희 씨, " 가장 젊은 평가관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제도에 불만을 품고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에 따른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더 깊이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벌금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윤희는 그의 경고를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과가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저는  자신을 속일 수 없으니까요."


회의실을 박차고 나오는 순간, 윤희는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정부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이 사회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만의 선택을 했다. 비록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밖으로 나서자, 윤희는 회의실 입구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민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윤희를 보고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잘했어요,” 민재가 말했다. “보아하니, 윤희 씨도 거부했죠? 저도 방금 그렇게 말하고 나왔어요.”


윤희는 조금 기뻐하며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민재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웃으며 말했다. “이제 우리의 선택을 해야죠. 그들이 원하는 게 아니라


---

작가의 이전글 태어난김에 꽃길 건강 걷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