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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헌문학 Oct 22. 2023

겨울 새의 시선

             겨울새의 시선     


빛살 휩싸여 알몸 매맞고 있는, 은빛 聖像 같아…… 올올이 세세히 영롱히 언 창문 우엔 화려한 聖畵 한 점 새벽성에는 은색화첩을 조각했다. 언 심장의 한 점 핏물같이 강산의 수은주는 마이너스 15도에 고여있네. 온 땅 얼어붙어 에인 휘파람이 칼춤을 추는 사바세상 빙점에 갇혔네. 한참을 묵음폭설 뒤덮인 안양천변으로 부동의 시선 놓아둔다. 나는 지금 겨울나무를, 흰 광야를, 겨울을 마주한 것이다. 다시 겨울, 혹한의 겨울 만물의 속삭임이 들릴 듯, 들릴 듯도 하여 눈동자에 비치던 것들 눈썹이 젖어든 까닭에 관하여 가늠해 본다네. 당신, 당신은 누구신가요? 어머니는 말씀하시겠지.     

바람… 그건 바람이다. 딸아, 그건 겨울 바람이란다. 휘감긴 광풍 뚫고 내달리는 하행선 기차를 떠올려보렴. 차창에는 낯익은 동그라미 하나가 두둥실 떠있지. 그림자는 유령만 같아. 그림자 박피를 치고 가는 밤바람결엔 그리움이 추출되네. 어머니는 말씀하시겠지. 애야, 겨울 밤. 그건 중생들 백팔개 번뇌 백팔번 하품으로 새어나와 황혼 어스름을 칠해놓고 회칠 재로 타버린 것이지. 시나브로 암흑의 오선지 위로 이분쉼표가 내걸렸다. 음표들 일제히 깃을 털어 날아오른다. 반야심경 독경 소리, 그 같은 것이 들려올 듯 한데. 여윈 불상에는 흥그러운 후광이 서려있다. 동상 걸린 다섯손가락 오그라드니 멍처럼 푸른 비구니 맨 머리로 찬 빗물 떨궈질 때 그 밤 노비구니 홀로 입적해 등신불이 되신다네. 그 밤의 칠흑어둠이 이 겨울의 냉기라 해야 한다. 작금의 혹한을 사생한 추상화 한 폭이다. 네 몸을 때리고 간 건 겨울바람, 바람이란다.     

겨울 나무, 너는 깡마른 각질이 인 베르나르 뷔페 선(線)과 같은 내성적 몸이다. 친애하는 시몬느 베이유 선생을 닮으신 게오라그 트라클 시집에나 등장하던 결벽증 노래다. 프란체스코수도회 수도사들 망토빛에 비둘기까지 닮아있는 에밀리 디킨스의 수녀적 문체, 그것이다. 갈라진 피부는 푸석푸석, 따끔따끔, 가지가지 마다의 관절염이 전달된다. 항의하는 네 꺾인 손목들 가느다란 비명이 회초리를 갈기지. 나무, 겨울나무 말이다. 하여 우리는 잠시 귀청을 꺼둔다.     

눈, 너는 눈이다. 산등성이 몰려다니는 어린 양떼의 향연 차이코프스키 비창 흐르는 빈 방으로 잠입한 흰 달빛이불의 두꼐다. 네 눈 멀게 한 건 눈의 빛깥은 언젠가 할머니 화장하시던 날, 손녀의 어깨에 걸쳐진 소복 귀섶으로 꽂힌 철 없던 토끼풀 무결하게 하이얀 빛깔 좀 보렴. 그 백치조의 미백이다. 소독, 멸균, 탈색, 혹은, 서늘한 마취의 작업, 이는 비릿한 눈맛과 같아. 그래, 네 몸뚱이 떨게 한 건 눈오는 날의 고요다. 이 적요 속에 정제된 눈물방울이 육각형 雪의 결정으로 결빙하는 찰나, 현기증이 인다. 하여 우리는 잠시 이성을 꺼둔다.     

이 한 줌 얼, 투명한 얼음꽃이 되는 지금은 몇 시일까? 겨울 어둠, 겨울 새벽 창을 열면 차가운 쾌락이 밀려들지. 허기가 일어 어둠 한 조각을 집어삼킨다. 시린 기운 울대에 걸린 흑암 울컥 차가운 통증이 왔고 달콤했다. 이내 어둠이 나를 씹는다. 극빙나라 얼음여왕께서 삼가 날려보내신 그림엽서 속 백야인 것이다. 그 스케치 속 백야의 창공에는 오로라가 파도를 치지.엉킨 념의 묶음, 올이 풀려오네. 검은 허공 유랑하는 은빛 돛배 작은 무인선 배마다 백목련 무리가 송이송이 피어올랐네. 만개한다. 봉긋이 혼의 집어등 일제히 스위치를 켰지. 걸려든 넋들은 고개를 늘어트리고 펄럭, 펄럭, 쓸쓸하다며 졸고들 있다네. 하여 우리는 잠시 목청을 꺼둔다.     

별, 지금은 목하 별들의 계절- 겨울 밤, 어둠의 바다, 겨울하늘, 바다 같은 어둠, 두 마디를 되뇌어보네. 존재는 어둡다. 존재는 외롭다.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존재는 반짝인다. 존재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까만 밤 태워 미망 불 밝혀 타오른 별이 된다. 질끈 휘청여라. 부시어라. 별 하나 반짝인다. 삭혀둔 눈물샘, 고아 같은 성좌들의 맥은 한가닥 붙어있는 가녀린 목숨으로 찌르르, 눈꺼풀도 경련을 하지. 잊혀진 영혼은 춥기만 하다고, 나신 드러낸 별들은 消盡된 형광 필라멘트 마냥 깜박 깜박인다네. 떨고 있는 별, 억 년 넘는 한은 헤아릴 수 없어라. 번뇌가 밤의 흑강으로 풀어헤쳐진다. 이 별들은 번뇌라는 인불에 데인 흉터자욱은 아닐까. 명 지닌 것들의 천형 징그러운 고독 덩어리인 건 아닐까?     

이 녁을 홀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머니는 말씀하실테지. 네 눈을 멀게 한 사방의 상형문자란 춥고 주린 얼들이 두 손 맞잡고 기도하는 순간에 감응한 것이라고. 기도문의 떨림을 음각한 것이라고. 눈물샘의 미련을 매장하는 안간힘으로 무덤처럼 제 살을 도려낸 표지노라고. 그 상형문자의 전언 속 묵음의 비명 숨결 그 점자의 무늬를 감각하는 것이라고. 입 다무신 그녀에게선 한 파람의 연민이, 한 숨의 겸허가, 한 줌의 준엄이, 한 방울의 법열이 배어있지. 지구 북반구 무죄한 시간의 시들을 잉태했다. 얼음불에 화형되는 벌거벗은 聖像와 같이 결백하여라. 그러니 그대여. 이제는 침묵을 하자, 내부의 귀신과 대면하기 위해서. 지금은 타인의 온기 그리워 한 뼘 가차이 모여앉는 시간이라네. 두 발 짐승들 가면의 거죽 벗기워다시 人間으로 머무는 시간이라네. 바야흐로 지금은 혹독하게 순결한 여신을 닮은 명상의 절기, 겨울, 겨울, 겨울, 혹은 꼬리 긴 동면 속 한 철의 꿈, 빙하기 겨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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