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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형 변호사 Jun 20. 2018

등골 브레이커의 기억 (2) - 첫 제출

2011년 겨울

회계사들은 엑셀을 프로게이머처럼 쓴다.


마우스 없이 키보드와 단축키만으로 수백개의 시트와 수천 행렬의 표를 만들고 함수를 입력하고 화려한 그래프를 그려낸다. 대형 M&A 실사장에서 같이 일을 하면 정말 장관이다. 똑같은 랩탑을 테이블에 놓고 일사불란하게 자료를 정리하고 리포트를 작성한다. 그런데 우리는 솔직히 너무 하는 일이 없어 보여서 눈치 보일 때가 있다. 사람도 회계사들보다 훨씬 적고, 현란한 키보드 소리에 눈이 돌아가는데, 우리는... 주로 종이로 된 자료를 고요히 넘겨 보다가 뭔가 이슈가 있어 보일 때만 손이 움직이니까.


아니, 변호사도 할 수 있다.


MS Word, 아래한글이 우리 무기가 아니던가? 


포맷과 디자인을 매우 중시하신다는 우리 고객님에게 강렬한 첫 인상을 남겨주어야 한다는, 게다가 경쟁사로부터 넘어온 고객님이라니. 무언가 엄마 친구 아들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이 복잡미묘한 아드레날린의 기운을 타고 컴퓨터를 켜는 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근데, 어디에요? 그 전?


선배에게 물어 보았다. 당연한 궁금증이면서, 스스로의 전투력을 높이려는 은근한 자기 도발.


A랑 했다고 하네.


A라고라. 전투력 게이지가 위험 수치를 넘는다. 


우리는 항상 생각했지. A가 덩치는 크고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가 하고 있는 이 분야에서 전문성과 퀄리티는 우리가 최고라고. 규모가 좀 (아니 많이) 작아서 그렇지, 언제든지 붙으면 이길 수 있다고.


그러고 보니, 고객님이 보내 준 MS 워드 파일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OOO_967901v7.doc


967901v7. 보통 로펌에서 만들어진 문서들은 저런 요상한 숫자들을 뒤에 달고 있는 경우가 많다. 


"967901"은 그 로펌의 데이터베이스 관리 프로그램에서 자동으로 생성한 숫자다. "v7"은 7번째 버전이라는 뜻이다. 문서는 곧 로펌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기 때문에, 로펌의 변호사들은 자기 컴퓨터가 아니라 일종의 회사 클라우드 시스템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 문서를 만들면 고유 번호가 생성되고, 버전을 업데이트할 때마다 v 뒤의 숫자가 바뀐다. 


이게 사용하는 시스템마다 다르기 때문에 파일 이름을 보면 대략 어느 로펌에서 만든 문서인지 알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A 스타일이었네.


드라마 굿 와이프에 나오는 로펌 사무실이라는데.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예전에 제출했다는 자료를 열어 보았다.


역시, 딱 세 마디로 요약 가능한 것. 너무 예상되는 그 내용.


우리 제품 안비싸고요, 품질 좋고요, CSR 열심히 하고 있다냥!
* 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의 약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뜻 그대로, 회사가 영리를 추구하는 집단이긴 하지만 기부, 봉사 등 사회적 활동도 한다는 것을 보여줄 때 쓴다. 법적인 의미는 전혀 없긴 한데, 공정위 공무원이나 판사도 정부의 일부인지라, 원래 정부 너네가 해야 할 일을 우리가 대신하고 있으니 혹여나 우리가 잘못한게 있어도 좀 살살해 주셔. 이런 뉘앙스로 쓰게 된다.


하지만, 무엇을 말하는지보다 어떻게 말하는지가 더 중요하고, 어떻게 말하는지보다 누가 말하는지가 더 중요한 법. 담당 공무원이 수백번도 더 들어온 뻔한 이야기이지만, 어떻게하면 오늘도 칼퇴할까를 꿈꾸며 나른한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을 그에게, 우리 이야기를 한 번만 좀 봐 주세요, 한 글자라도 좀 읽어 주세요 어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은 바로 변호사의 몫이 아니던가.


그래서 나는 지금도 법률 문서에 사진과 표와 숫자를 넣는 것을 좋아한다.


하루 종일 하얀 벽 밖에 없는 무미건조한 사무실에서 '나 이렇게 많이 썼어요' 하고 서로 자랑하는 지루한 긴 글을 읽어야 하는 그 분들을 위해.


아, 물론, 계약서에는 사진 넣으면 안됩니다.


자, 그럼 이제 현란한 MS 워드의 스킬을 보여 주자.


다행히도 어릴 때 아래한글 1.5부터 써온 짬이 있어서 그런지, 문서 편집에는 꽤 취미가 있었다. 우선 스타일링을 다듬고, 단축키를 지정하고, 머리말 한쪽 끝에 N의 로고를 작고 세련되게 박은 포맷을 완성한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법률 문서가 아니라 짧은 에세이를 읽는 느낌을 주자. 주장은 지금 하지 말자. 물론 여기저기 복선은 깔아야 한다. 나중에 쟁점이 될 수 있는 것들 - 시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가격 변동에 관한 설명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등 - 에 대해서는 스토리에 잘 녹여서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게 해야 한다.


국내 신발 시장은 4조 원이 넘는데요, 그 중에 N은 30년 넘게 한 길을 걸어온 진실한 기업으로 1등 먹고 있긴 하지만 점유율 높지 않고 경쟁 치열하고요!


눈물이 나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법적 분쟁이라고 해서, 수학 함수나 코딩 돌아가듯 사람이 삼단 논법으로 설득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감정적이고 관계 지향적인 동물이어서, 우선 마음으로 결론을 내리고 관계에 비추어 문제 없는지 보고 머리로 결론을 합리화한다. 판사나 공무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글의 특정 내용이나 특정인과 관계 없습니다 (...)


2주를 고생해서 - 물론 언제나 그렇듯 N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 새로운 소명자료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 마음에는 꽤 든다. 선배 변호사의 마음에는 꽤 안 든다. 하지만 여러 번의 이메일과 추가 회의, 내용 수정, 문구 수정, 그리고 포맷과 디자인에 까다롭다는 회장님의 최종 컨펌까지 무사히 마치고. 이제 아이를 입양 보내는 마음으로 문서 이름에 '최종본'을 적어 저장하고 인쇄를 준비한다. 


아, 컬러로 찍어서 양장제본 하죠?


오바다.


점잖은 법률문서를? 


그 때까지만 해도 정부 기관에 제출하는 문서는 흑백 인쇄에 스프링 제본이 기본이었으니.


하지만, 문득 담당자에게 단순한 소명자료 문서가 아니라 작은 책을 받은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내용도 삽화를 넣은 스토리 형식으로 최대한 술술 읽히도록 줄글로 구성했는데, 복사집에서 가져 온 연습장 같은 스프링 제본이 아니라 진짜 책처럼 한 번만 제본해서 내 보면 어때요?


허허허.


진짜 그렇게 제출되었다.


한 권을 기념으로 똑같이 남겨 두었다.


다시는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것 같았으니까.


자, 하지만 사건은 이제서야 시작된 것이다. 


개인이든 회사든, 분쟁과 비난에 휘말리면 누구든 억울한 점이 있다. 거품을 걷어내고 본질을 잘 찾아내서, 사건에 관심 없는 누군가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가슴과 머리로 잘 이해하도록 해서, 억울함을 풀고 계속 잘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변호사의 역할이 아닐까.


이제 세 달 정도는 RPM이라는 신세계를 헤메게 되겠군.


*RPM (Resale Price Maintenance): '재판매가격 유지행위'로 번역되는 유통 과정에서의 공정거래법 위반 유형. 제조사가 유통사에게 가격을 지정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다. 아주 예전에는 아이스크림에 권장 소비자 가격이라는 이름으로 "500원" 이렇게 붙어 있었지만 어느 순간 없어진 것과도 이것과 관계 있다. 미국에서 100년만에 판례가 변경되었을 정도로 논란이 많은 쟁점이다. 


To be continued..



* 이 글은 작가의 경험을 기초로 각색된 것으로서 실제 사실관계나 사건 내용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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