썼다 벗을 수 있어야 모자인 것처럼

짜증도 입었다 벗을 수 있어요.

by 심마니

모자를 썼다 벗었다 하는 것처럼,

코트의 허리끈을 묶거나 푸는 것처럼,

목도리를 풀었다 다시 동여매는 것처럼,

'짜증'도 내가 원할 때 벗고 다시 입을 수 있다면 어떨까?



놀라운 것은 '짜증' 뿐만 아니라 모든 부정적인 감정은 조절이 가능하다. 즉, 선택할 수 있다.

헐거웠던 나사를 충분히 조이면 믿음직스럽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듯 감정 또한 마찬가지로 (수많은) 연습을 통해 덜 괴롭게 덜 고통스럽게 우리가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괴로운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란 불가능하다.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오감 혹은 감각을 느끼는 것과 같아서 '보이는 그대로', '들리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를 경험하고, 그 경험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의 판단이 섞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하는 경험인 것이다. 그래서 그 감정을 느끼는 것은 고스란히 수용을 하되 깊은 수렁에 빠지기 전 덜 괴롭고 덜 고통스러운 상태로 조절과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내가 지금 이야기를 하고 싶은 '짜증'이란 "그 인간 짜증 나"가 아니라 정확히는 '짜증을 잘 내는 사람'의 감정 상태다.


'짜증'은 무언가 일종의 '화'같은 감정인 것인데 내 속에 있을 때는 그저 '화'일 수 있지만 외부로 비집고 새어 나가는 순간 단순한 '화'가 아닌 상대방을 향한 '공격성'의 분출인 경우가 많다. 특히, 이 공격성의 이면에는 의도를 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상대방의 컨디션이나 감정 상태를 멱살 잡아 바닥에 내려 박고 말겠다는 해로움의 불씨를 던져버리는 것과도 같다. 해로움의 불씨를 결국 상대방에게 넘겨버리려는 의지가 다분하다는 것이 나의 분명한 생각이다.


만약 상대방의 어떤 행동으로 말미암아 짜증과 같은 화가 올라와 표출을 했다면 '앙갚음의 행태'인데, 그건 '쌍방', '주고받음'이라 셈 치지만 '짜증스러움', '신경질'을 공격성으로 분출할 때 상대방은 영문도 모른 채 봉변을 당하는 격이 많다. 나에게 해로움을 주지 않은 상대방에게 해로움을 주고야 말겠다는 공격성 말이다.

짜증의 더욱 무서운 사실은 짜증을 표출했을 때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짜증이 강화되어 상대방을 집어삼킬 정도의 화마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소거되거나 잠재워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상대방이 강력하게 반발을 하거나 짜증스러운 태도에 대해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공격성에 대해 콕 집어 알려주면 '짜증' 후 밀려오는 민망함이나 부끄러운 감정을 건네줄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짜증과 관련된 일화를 꽤 경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직장 상사의 기분이 태도가 되는 표정이나 말투도 주변 동료들에게 해로움을 건네는 꼴이며, 부부 싸움 후 자식에게 불똥이 튀어 괜스레 짜증을 내거나 받는 일, 육아로 지쳐 아기에게 화를 낼 수 없으니 남편에게 짜증을 날려버리는 일, 연인 사이 악의가 전혀 없는 실수임에도 날씨가 덥거나 춥다고 해서 짜증으로 상대방의 기분을 잡치게 만드는 일 등등.


짜증을 당한 순간에는 미처 대응하지 못했더라도 곱씹을수록 괘씸하고 억울하며 화가 나는 일이다. 무엇보다 '내가 무얼 잘못했지?' 생각하여 스스로 무죄 판결을 내렸을 땐 더욱이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부끄럽지만 나 또한 남편에게 못된 성미를 보일 때가 많았다. 체력적으로 고되고 지칠 때 남편은 가만히 있다 봉변당한 일이 신혼 초부터 있었다. 금방 미안한 마음이 들어 사과를 했지만 남편은 나의 공격성이 담긴 짜증에 대해 깊은 마음의 상처가 된다 끊임없이 읍소하고, 나와 대화를 나눴다. 돌이켜보니 내가 짜증을 받았던 성장과정에서 그렇게도 상처가 되고 억울함이 쌓였건만 내가 커서 똑같은 언행을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현재도 나는 끊임없이 성찰과 더불어 연습을 반복 중이다. 이런 반복 연습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 끝까지 대화로써 감정을 풀어내기 위해 먼저 손을 내밀어줬기 때문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복수심으로 똑같이 내게 짜증으로 앙갚음했다면 '짜증'에 대한 성찰은 한참 후로 밀리거나 기회조차 없었을지도 모르니 끔찍한 일이다.


자, 그렇다면 방법이 무엇인가?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므로 분출 단계 직전에 잠시 그 자리를 피하여 정신을 가다듬는다(짜증이나 화를 경험한 그 공간에서 잠시 분리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주의의 환기가 꼭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감정을 '선택'하고, '주도'하며 '탈부착'할 수 있다는 자신감, 자기 효능감을 내세워 나는 감정을 선택하기 위해 심호흡을 시작한다. 그리고 감정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스펙트럼이 넓은데, 양극단에 있는 감정을 선택하는 것은 어렵다. '짜증' 상태에서 '행복'? 아닌 것이다. '짜증'에서 '덜 짜증', '짜증'에서 '시무룩'이 정도 선이 가능하다. 조금씩 조금씩 스펙트럼 선상에서 선택을 이동시켜야 한다. 이마저도 물론, 쉽지 않고 실패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많이 나아졌다. 남편도 나도 짜증의 강도와 횟수 측면에서 많이 나아졌음을 인정하고 있다.

상담 장면에서도 이러한 연습을 한다. 어떤 이는 공황 상태에서 호흡을 가다듬는 연습, 강박 행동을 반복할 때 선행되는 생각을 점검하는 연습 등. 짜증. 불안도 두려움도 공포감도 마찬가지다. 다룰 수 있다.

상담에 대해 불신하는 사람들이 많고, 상담 장면에서 좋지 않은 경험을 한 사람들도 많다. 이런 이야기를 마주할 때마다 슬픔과 서글픔에 머무르기보다 미약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고 나아지고, 좋아지는 경험들을 많은 분들이 해보길 희망해본다. 모두들 알고 있을 그런 방법이지만 생각보다 의식으로 꺼내 실제 실천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다뤄 본 성공 경험들이 적게라도 쌓이기 시작하고, 습관화되며 더 어려운 감정 단계에도 적용을 하면서 고된 인생살이를 버틸 대응책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나에게 강한 자극으로 다가오는 감정들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모든 감정은 존중받아 마땅하나 나 혹은 타인을 해롭게 한다면 조절할 필요는 있겠다. 희망적인 것은 모든 감정은 선택할 수 있고, 누구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나의 감정을 선택하고 조절할 수 있게 된다면 뾰족한 창은 아니지만 단단한 방패 무기를 장착한 셈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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