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5월8일 저녁 9시30분 나는 태어났다. 부모가 자식에게 감사와 섬김을 받으라고 있는 어버이날에 엄마는 아침부터 산고를 치렀다. 나는 생애 첫 어버이날부터 불효를 한 셈이다.
내 부모는 출산 때까지 내가 아들인지 딸인지 몰랐다고 한다. 엄마가 다닌 산부인과는 태아 성별을 알려주지 않았다. 단지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태어나기 전에 죽임당하는 여자아이들이 1980~1990년대까지만 해도 많았다고 하니 병원의 이런 방침도 이해가 된다.
딸인 것 같다고 생각은 했단다. 엄마는 나를 가졌을 때 ‘윗배가 받힌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동네 아줌마들에게 물어보니 “아랫배가 받히면 아들이고 윗배가 받히면 딸”이라고 했단다. “머리를 감으려고 고개를 숙여도 윗배가 턱 받히고, 방바닥 걸레질 좀 하려고 앉아서 허리를 숙여도 윗배가 턱턱 받혀서 아주그냥 뭘 할 수가 없었다니까”라고 엄마는 얘기했다.
첫째로 아들을 낳았으니 둘째는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엄마아빠는 한 마음으로 바랐다고 한다. 낳아보니 정말로 딸이어서 아빠가 특히 좋아했단다. 그런데 엄마는 출산 후 며칠 뒤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좀 놀랐다고 했다.
“딸이라고 낳아놨는데 애가 너무 시커멓고 못 생긴 거야. 오빠는 갓난애 때 엄청 뽀얗고 예뻤거든. 아이고, 얘는 이렇게 생겨서 어쩐다 싶었지.”
애기는 다 귀엽다지만, 내 애기 때 사진을 보니 내가 봐도 못 생겼다.
[고춧가루를 팍팍 친 콩나물국]
얼굴은 나이가 들면서 그럭저럭 사람같이 되었다. 그런데 피부는 영 좋지 않아졌다. 나는 어릴 때 아토피로 고생했고, 지금도 계절이 바뀌는 시기엔 눈가와 입가, 팔 옆면 같은 데가 자주 가렵다. 엄마는 이에 대해 이상한 추측을 한다.
“네 오빠를 가졌을 땐 입덧을 하나도 안 해서 맨날 사골 국을 먹었어. 우유도 많이 마시고. 애를 처음 가져봐서 좋다는 건 다 먹었지. 그래서 네 오빠 피부가 저렇게 뽀얀 것 같아. 근데 너 뱄을 때는 허구헌날 속이 메슥거리더라고. 콩나물국을 한 솥 끓여다가 고춧가루를 팍팍 쳐서 먹었어. 오빠 가졌을 땐 커피랑 콜라 같은 것도 하나도 안 마셨는데, 너 때는 사실 좀 마셨거든. 그래서 네가 이렇게 살성이 안 좋은가봐. 어휴. 그 때 그런 걸 먹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도 속이 메슥대니 좀 먹었더니만. ”
콩나물국이니 고춧가루니 하는 건 내 피부에 아무 상관없는 변수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엄마는 미신 같은 한탄을 한다. 그래서 나는 어디가 아무리 가려워도 엄마 앞에선 긁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엄마는 귀신같이 내 피부의 이상을 알아채고 예의 그 콩나물국과 고춧가루 타령을 하며 자기를 탓한다. 그런 엄마는 사랑스럽고 귀엽고 또 안쓰럽다.
[알아차림]
이제까지 사는 동안 내게 가장 큰 위로가 된 말은 내 아빠의 말이다.
“너무 기를 쓰고 살지 마라.”
기를 쓰며 살고 있다는 걸 부모에게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기에 나는 놀랐다. 부모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을 잘 알아챈다. 누군가의 어떠함을 알아채는 건 사랑의 징후이자 증거라는 것을, 나는 내 부모를 통해 알았다.
["그래야 네가 다시 엄마 딸로 태어나지"]
어릴 때 언젠가 엄마에게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그 때도 아빠랑 결혼할 거냐"고 물은 적이 있다. 엄마는 대번에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한 번 살아봤으면 됐지, 같은 사람이랑 뭘 두 번을 살아.”
나는 웃었다. 그런데 엄마는 이내 말을 바꿨다.
“좀 아까 한 말 취소. 다시 네 아빠랑 결혼해야겠다. 그래야 네가 다시 엄마 딸로 태어나지.”
나는 또 웃었는데,마음이 좀 울렁였다. 나는 이런 사랑의 경지를 아직 다 헤아리지 못하겠다.
[내 며느리가 내 생일을 챙긴다면]
엄마는 ‘뼈 때리는 팩트 폭격’을 쿨하게 하는 것에 능하다.
“네 오빠가 말은 틱틱 하는 것 같아도 사실 성질이 유순해. 너는 차분한 것 같아 보여도 가만 보면 성질이 불같아. 고집도 아주 황소 심줄이고. 그런 거 보면 천상 네 아빠 딸이라니까. 그래도 네 아빠가 사람은 착해. 너도 참 착하긴 해.”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널 생각한다고 해도, 네가 너 자신을 생각하는 것만큼 널 생각하는 건 아니라는 거 알지? 너도 이제 나이 먹고 남들한테 뭐 조언을 해 봤을테니 웬만큼 알 거야. 남들이 ‘넌 다 잘 할 거야,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봐’ 할 때 잘 생각해. 네가 뭘 잘 할 수 있고 뭐는 못 하는지 네가 알지? 남의 말은 반만 들어.”
“너 네가 평생 젊을 줄 알지? 너도 이제 관리를 해야 돼.”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엄마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엄마는 먼 미래를 상상하는 데에도 능하다.
“시어머니 생일이 어버이날이니 나중에 네 며느리는 좋겠다. 시어머니 생일하고 어버이날을 한 번에 퉁칠 수 있어서.”
내 며느리가 내 생일을 챙기는 상황에 대한 상상이라니. 대체 몇 단계를 건너 뛴 생각인지.
[사랑의 부산물]
엄마의 자식 사랑은 맹목적이다. 하지만 바라는 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내 퇴사 이후 엄마는 내게 이런저런 아쉬움을 얘기하다가 “넌 부모 생각은 안 하니”라는 말을 했다. 나는 조금 상심했다.
부모의 안녕함을 생각한다면 계속 착실한 직업인으로 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오빠가 감정평가사 자격증 공부를 하겠다며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은 게 벌써 2년이 넘었다. 부모는 딸이 대학원에 가겠다며 회사를 그만두는 것까지 보게 됐다. 어쩌다보니 2연타의 두 번째 타자가 된 나는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내 많은 것을 알아채는 엄마가 내 이런 마음을 못 알아챘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까닭 없고 실속 없는 토로다. 어쩔 수 없이 생긴 기대이기도 할 것이다. 나에 대한 엄마의 기대는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존재했던 목적이라기보다, 사랑하다보니 나온 결과에 가까울 것이다. 그것은 사랑에 딸려 나온 의도치 않은 부산물 같은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나는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의 안녕함을 바란다. 하지만 그 사랑과 바람은 내가 내 인생을 두고 하는 선택의 최대 변수가 되지 못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에 영영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경애하는, 버겁고도 벅찬, 나의 부모]
엄마가 내 서울 집에 다녀가면 늘 냉장고가 꽉 찬다.
어버이날이자 내가 태어난 날인 지난 8일 아침이 오자 엄마는 “딸램이 굿모닝~~~♡ 오늘 생일이야~ 생일 축하합니다 ㅎㅎ ~오늘은 맛난 거 드시오 ♡♡♡♡” 하는 물결이 넘실대고 하트가 수두룩한 카톡을 보내왔다. 아빠는 “자랑스런 내 딸 네 생일을 축하한다 잘 성장해주어서 고맙다 사랑하고 축복한다”는 문자를 줬다.
내가 경애하는, 버겁고도 벅찬, 나의 부모. 내 부모가 나의 어떠함을 알아채듯이 나도 언젠가 내 부모의 어떠함을 알아채 보듬고 감쌀 수 있을까. 자식은 평생 더듬더듬 부모의 길을 헤아리다 나이들 것이다. 부모는 당신들이 미처, 차마 전부는 이해할 수 없는 자식을, 여생 내내 살피고 생각할 터이다. 부모 자식 사이의 마음은 너무 크고 엄중해서 또 아득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