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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달 Mar 31. 2019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잘 할 자신 있지?’라고 나에게 매일 수차례 물었다. ‘당연하지’ 하는 마음과 ‘아니, 자신이 있었는데 또 없어졌어. 눈물이 나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이 번갈아 가로질렀다. 이번 주는 어려운 주간이 될 것 같다.


만 5년 3개월을 다닌 회사를 나오려 한다. 졸업하고 가졌던 첫 직업, 첫 직장이다. 처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각별한데 나는 어쩌자고 종이와 활자를 꽤 많이 사랑했다. 그래서 더 각별하다. 매일 36면~40면짜리 종이뭉치를 만들어내는 데에 자신이 가진 하루치 힘을 온전히 쏟아 붓는 이들의 열정도 애틋하게 사랑했다.


이별을 준비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미처 몰랐다. 밤마다 왼쪽으로 누웠다가 머리가 무거워 오른쪽으로 누웠다가 또 머리가 무거워 돌아눕기를 수차례 했다. 한낮에는 내 얼굴이 무겁게 느껴졌다.


하필 지금 인사 담당 부국장을 맡고 있는 선배는 내 첫 부장이다. 회사에 갓 들어와 취재가 뭔지 기사가 뭔지 하나도 모르고 천지 분간 못하는 스물여섯 살짜리를 자기가 맡고 있던 경제부로 데려왔던 선배다. 이 선배에게는 혼도 많이 났고 격려도 많이 받았다. 능력 부족으로 선배가 요구한 것들을 다 해내지 못했을 땐 “내 말이 우습나?” 라는 소리를 듣고 뒤에서 울었다. 언제였는지 선배가 내 딴엔 열심히 써서 올린 기사 도입부를 모조리 삭제하면서 “쪼그만 것이 글 욕심은 있네” 하며 웃었던 날이 있다. 그런 날엔 나도 뒤에서 웃었다. 내가 쓴 초고가 그대로 지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내 색깔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기뻤다. 그렇게 울며 웃으며 기자가 됐다.


어느 정도는 아버지 같은 분이다. (나보다 먼저 언론사를 떠난 내 친구는 이런 문화를 ‘폭력적 가족주의’라고 부르지만 어쨌든.) 작년 내가 한 사람을 만나고 있을 때 선배는 자기도 한 번 봐야겠다며 같이 만날 술자리를 만들라고 했다. 그 사람을 본 선배는 “사람 좋다. 시간 끌지 말고 빨리 결혼해라”라고 했었다. 몇 달 뒤 나는 그 사람과 헤어졌다. 선배는 “잘했다. 사실 그 때 네가 너무 좋아하는 티가 나서 말 못 했는데, 나는 사실 금마 맘에 안 들었다. 딴 놈 만나라”고 했다. 선배의 이 말들은 내가 헤어진 그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함께 떠오른다. 소중하다.


얼마 전 회사에서 마주쳤을 땐 이런 대화가 오갔다.

“니 요새 만나는 사람 있담서?”

“네? 아닌데요?”

“아니여? 니 요즘 연하를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던데?”

“아니에요. 휴. 연애 오래 안 하고 있었더니 웬 헛소문이.”

“뭐 좋은 소식 없나?”

“좋은 소식은 없고요. 휴. 그냥 제가 혼자 좀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

“허허허. 니 아직도 그러고 다니나?”


선배는 얼굴에서 긴장을 다 풀고 웃었다.


낮에 이래놓고서 오후 내내 신문을 만들다 마감 때 힘을 다 털어넣고는 저녁 무렵 지친 얼굴로 데스크 회의를 주재하는 이 선배를, 나는 또 사랑했다. 이 선배에게는 꼭 “저를 기자로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했다”고 말씀드릴 것이다. 그 때 눈물을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며칠 전, 나보다 먼저 기자 생활을 접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인사할 때 눈물이 나면 어떡해?”

“뭘 어떡해. 아이라인 마스카라 다 섞인 검은 눈물 흘리는 거지 뭐.”

“헐.”

“너무 걱정 마. 그냥 한 단계씩 밟아 가면 돼. 지랄 염병을 한 50번쯤 하면 그 때쯤 회사를 나올 수 있어.”


나는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으로서의 고통을 얘기했고, 친구는 이별 후의 후폭풍에 대해 얘기했다. 이별 뒤가 더 힘들 것이라고 했다. 친구는 자기 경험이 떠올랐는지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는 그 눈물을 익숙하게, 빠르게 말려 보냈다. 내게도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엄마에겐 미안하다. 지난 주말 엄마에게 내 계획을 얘기하자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너도 오빠도 왜 그냥 평범하게 살 생각을 안 하니.”


“더 잘 살기 위해 이렇게 살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나는 호언했다. 하지만 혼자 집에 돌아왔을 땐 좀 울었다. 부모 자식 관계가 채권자 채무자 관계여서는 안 되지만, 나는 어느 정도의 부채감을 갖고 있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 못 살아줘서 미안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두어 달에 한 번은 부모님께 값지고 맛있는 걸 사드리고 싶었고, 매달 몇 십만 원쯤이라도 부쳐드리며 살고 싶었다. 아마 당분간은 그러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영영 못 할 지도 모른다.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괜찮다. 그래도 나는 이게 낫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으니 한 번 해 봐야겠다. 다시는 궤도에 들어오지 못할 지라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섰으니 궤도 밖으로 한 번 나가 봐야겠다. 이전까진 망할까봐 두려웠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오히려 몰락하는 나를 멀찍이서 지켜보면서 박수를 쳐줄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한번 멋대로 해보기로 했다.



※ 김중식 시 '이탈한 자가 문득'의 원문은 행갈이 없이 죽 이어집니다. 제가 제 호흡에 따라 임의로 행을 갈아 적은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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