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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y JP Mar 30. 2020

2020년 3월의 마지막 일요일

2020. 3. 29. 일요일

어제도, 오늘도 집 밖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갔다. 비라도 안 왔으면 잠깐 리버사이드 공원이라도 다녀왔을텐데. 하루종일 재미없는 티비를 봤다. 혼자서 미술관에 가고 음악회에 가는 건 정말 잘할 수 있는데, 혼자 집에서 티비를 보는 건 참 어렵다. 드라마보다는 나를 웃게 해주는 예능이 좋은데, 내가 좋아하는 예능은 벌써 거의 다 봐서 다음 주를 기다려야 한다. 최근 보기 시작한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아는 형님'은 예전에 비행기에서 처음 본 이후로 가끔 보는데, 이틀에 걸쳐 '이태원 클라쓰'를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채 다 끝내고 방황하다가 아는 형님을 틀었다. 개그맨 김준현과 홍현희가 나왔다. 아이돌 두 명도 나왔는데 이제는 이름을 잘 모른다. 개그맨이 힘들까 아이돌이 힘들까 둘을 놓고 말싸움을 하는 대결이 나온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둘 다 힘들 것 같다. 모두들 다 힘들다고 하면 힘든 것 같기도 하다. 그 이후 나를 맞춰봐 코너에서 짝사랑 이야기가 나왔는데, 홍현희가 자기는 예전에 연하남을 만났는데 그 남자친구가 서른 살을 앞두고 심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이제 자기는 연하의 여자친구를 만나보고 싶다면서 헤어지자고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어반자카파의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 노래가 나오기도 전에 그 연하 남자친구를 통해 그 가사를 먼저 들었다고 했다. 그 후 이 노래가 나왔을 때 많이 울었다고 했다.


아는 형님을 멈추고, 내 한국 핸드폰으로 벅스를 켜고 보스 스피커를 연결한 후 널 사랑하지 않아를 틀어보았다. 이 가사의 맥락을 전부 이해는 못하겠지만, 진한 한국 감성이 느껴졌다. 옛날 노래라서 더 그렇겠지. 내가 대학생일 때의 강남역 근처 분위기랑 어울리는 노래.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멋 없고 어수선한 분위기, 그런 곳에서 마구잡이로 트는 유행가. 그런데 눈물이 났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방인으로서 미국에 와서 공부하고 적응하려고 애쓰고 일하고, 버거울 때도 있었고 즐겁고 찬란한 때도 있었다. 가슴벅찰 때도 있었고 많이 고독할 때도 있었다. 그 시간의 의미를 찾으려고도 하고 의미를 부여하려고도 했다. 소중한 시간들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게 두려워서 남는 시간에는 새로운 요리를 해보거나 새로운 외국어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냥 그 과정 자체를 즐기면 그만인데도 나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는 생각을 하며 괴로워한다. 가족들은 다 한국에 있는데 나 혼자서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지 답을 찾으려 하면서 또 괴로워한다. 이 마음은 남편과도 공유하기가 어려워서 더 힘들다. 착한 남편은 늘상 '그냥 일찍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오는 게 어때?'라고 물어보니까. 이제 한국에 돌아갈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고 한국 로펌이랑 연계되어 돌아가는 일이 있기 때문에 다시 한국 변호사님들과 연락이 잦아지고 있다. 뉴욕은 아직 일요일 저녁이지만 한국은 벌써 월요일 오전이 되었고, 계속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내일 일어나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본다. 뉴욕에 있어도 벌써부터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건만,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내 앞에 펼쳐질 업무들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현실이 될 것 같고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는걸 더 주저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은, 2020년 3월의 마지막 일요일인 지금 이 감정만큼은, 아마도 내일 오전에 일어나서 센트럴 파크를 5마일 뛰고나면 달라질 것 같은 감정일테지만, 당장 한국에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고 싶다. 집에 가서 H1, H2를 마음껏 안아주고 칭찬해주고 싶고, 남편과 식탁에 마주앉아 재미있는 대화를 하고 싶고 내가 뉴욕 집에서 갈고닦은 많은 요리들을 만들어주고 싶다. 내 소중한 친구들을 홍대, 한남동, 이태원, 청담동 등에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만나서 한국어로 실컷 수다떨면서 커피도 마시고 샴페인도 마시고 맛있는 케이크를 먹고 싶다. 한국에 가면 또 2018년, 2019년, 2020년을 가슴 시리게 그리워하겠지.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었던 이 시간들이 이제 마지막 장을 향해 간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되고 다음 날 눈이 부을 걱정을 안 해도 되는 이 시간들이 이렇게 마무리되어 간다. 뉴욕 집에서 밖에도 못 나가고 청승떨던 이 때를 벌써부터 되돌아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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