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녀와 나무꾼
다리를 다친 얼룩말을 생각해 보자. 아주 탄탄한 목덜미와 매끈한 엉덩이를 가진 그 얼룩말은 태연하게 걸으려고 애를 쓰지만 어디선가 사자들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온다. 바람결에 묻어온 피 냄새를 맡은 것일까? 얼룩말의 미세한 떨림을 감지한 것일까? 사자가 얼룩말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건 시간문제다. 한번 벌어진 상처는 귀신같이 발각된다. 사자의 후각이 아니더라도 내 앞의 상대가 어떤지는 그냥 느낄 수 있다.
명원이 수민의 손을 마주 잡은 것도, 어깨를 감싸 안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눈을 빛내며 당당하게 굴었지만 상처 냄새를 감출 수가 없었다. 현우가 끝까지 히죽 웃은 것도 그래서였고 수민이 먼저 문을 열고 나와버린 것도 그래서였다. 아마 빗속을 무턱대고 걸어간 것도 상처에서 나는 피 냄새를 지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수민씨. 수민아! 저기요!”
쏟아지는 빗줄기는 사람의 눈을 흐리게 했다. 그래도 명원은 보았다. 거울처럼 말갛던 수민의 얼굴이 서서히 분노와 수치심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그녀는 여전히 어꺠를 펴고 꼿꼿하게 서 있었지만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내지 않았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들이 수민을 적셨다.
명원은 얼른 수민을 잡고 차로 끌었다. 그도 흠뻑 젖었다. 머리카락과 옷에 맺힌 물방울이 차 시트 위로 뚝뚝 떨어졌다. 명원은 차 트렁크 보관 박스를 뒤져 티셔츠 몇 벌을 찾아냈다. 이 차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소품쪽 일을 맡아 하는 모양이었다. 보관박스에는 우스꽝스러운 수염이나 조화같은 것도 들어있었다. 티셔츠는 비닐 포장 된 새 것이었다. 명원이 꺼내 펼쳐 보니 3년전쯤 회사에서 나눠준 창립 10주년 기념품 중 하나였다. 그는 티셔츠를 수건 삼아 수민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새 옷이라 물 흡수가 잘 되진 않았지만 그냥 했다. 젖은 속눈썹과 붉어진 눈두덩이는 모른척 하고 이마, 턱, 그리고 목덜미와 쇄골까지 꼼꼼히 닦았다. 명원은 이 행동이 수민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랬다. 정말 그 생각뿐이었다.
“줘 봐요.”
잠시 후에 수민이 나지막하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명원은 물을 흡수해서 제법 무거워진 티셔츠를 건네주었다. 수민은 티셔츠를 손에 그러쥐더니 명원의 턱 끝에 맺힌 물방울을 닦았다. 티셔츠 촉감이 거슬거슬했다. 수민은 명원처럼 천천히 물기를 닦아내 주었다. 수민은 고개를 살짝 치켜들고 명원의 눈썹 언저리를 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곤란하게 만들었죠?”
“괜찮아요.”
“사람 마음이 참 우습죠? 분명 어제까지는 그 사람이 했던 모든 말이 진짜였는데 오늘은 공허하게만 들렸어요 왜 3개월전부터 연락을 끊었는지 보자마자 알겠더라구요. 그 사람, 거짓이 너무 커서 채울 엄두가 안났던거에요. 그래서 짐짝 버리듯 자기 인생에서 날 내던진거에요. 그런것도 모르고 나 혼자 한국 와서 …”
명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 큰 일이 아니었다. 살다 보면 눈이 가려질 때가 있다. 내가 판 구덩이가 세상 전부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사랑이 보통 그렇지 않나. 사랑은 좁고 편협하며 이기적이다. 나와 상대, 두 사람을 말고는 아무도 그들의 세상에 들이지 않는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랬고 춘향이와 이몽룡이 그랬듯이. 그런 사랑의 속성을 이용한 건 현우다. 수민은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지킨 것 뿐이다. 다리를 다친 얼룩말이 멀쩡하게 걷는 척 한 것처럼.
둘은 물기를 대충 닦은 뒤 잠시 침묵했다. 시간은 저녁 6시가 넘었다. 문득 허기가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아직 회사에 연락도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돌아가야 할 시간인데. 응급실 안에 있는 루오는 괜찮은 건지. 처리하지 못한 문제가 있는데 꼼짝도 하기 싫었다. 그때 수민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는게 좋을 것 같았다.
“비가 언제쯤 그칠까요?”
“한번 볼께요.”
명원은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나 핸드폰 화면을 켜자마자 ‘부재중 전화 15통’ 이라는 알림이 떴다. 대부분 회사와 멤버들이었다. 아마 병원에서 찍힌 사진이 SNS에 뜬 모양이다. 그것만 봐도 충분했다. 명원은 전화를 하고 오겠다고 말을 하려 수민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 말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명원의 머릿속을 깡그리 날려버리는 일이 눈 앞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수민이 몸을 뒤틀며 젖은 티 셔츠를 벗고 있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남자 손바닥만한 티셔츠였고 젖은 상태라 벗는 게 쉽지 않아서 수민은 훌렁 벗어버리려 했으나 그러질 못했다. 그 결과 수민은 허리를 틀고 양팔을 들어올리며 용을 썼다. 명원은 제 눈 앞에 나타난 싱그럽고 탄력있는 흰 살결을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마침내 수민이 티셔츠를 벗고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을 때 자신이 무엇을 본 건지 깨닫고 얼굴을 확 붉혔다. 어디선가 꽃향기가 났다. 진짜였다. 차 안에 식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데 명원은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꽃냄새? 아니. 아니다. 이건 수민의 냄새였다.
수민은 탱크탑만 입고서 하얗고 긴 팔을 뒷 좌석으로 뻗었다. 그녀의 행동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마치 명원이 함께 없는 것처럼 굴었다.
명원은 자기가 여기 있다고 손이라도 번쩍 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명원의 마음 속 소리를 들은 것일까? 수민은 뒷좌석에 있는 자신의 가방을 가지고 오려다 멈추고 명원쪽으로 몸을 휙 돌렸다. 명원은 흠칫 뒤로 물러났다. 수민의 미간을 반듯하게 펴고 진지하게 물었다.
“내 바지가 그쪽에겐 안 맞겠죠?”
명원이 굳은 입꼬리를 올리고 고개만 살짝 까딱했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나 먼저 갈아입을게요. 춥고 뻣뻣해져서 못 참겠어요.”
“여기서 갈아입겠다고?”
명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째졌다. 수민은 의아하게 보더니 손으로 밖을 가리켰다.
“딴 데로 가면 저 비를 다시 맞아야 해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이게 무슨 큰 일이라고. 뱀이 허물 벗 듯 스무스하게 벗고 입을 수 있어요. 몸만 잠깐 돌려봐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눈을 감던가!”
너는 나를 그렇게 믿니? 명원은 묻고 싶었다. 내가 실눈이라도 뜨면 어쩌려고? 실눈… 하. 자존심이 왜 상하지? 명원은 자신이 게슴츠레 실눈을 뜨고 여자가 옷 갈아입는 모습을 훔쳐보는 상상을 해보았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분명 명원은 두눈을 꼭 감고 상대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배려남이다.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수민은 명원을 남자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다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너는 내가 남자로 안 보이니? 나는 너한테 요만큼도 걱정할 거리가 없는 남자야?
가방지퍼가 경쾌하게 찍 하고 열렸다. 수민은 차곡차곡 접어 넣어 뒀던 검은 티셔츠와 바지를 꺼내서 공중에서 탈탈 털었다. 이제 입겠다고 깃발을 흔드는 것 같았다.
자동적으로 명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짧은 침묵 후 스윽 슥. 피부에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신발을 벗느라 힘주는 소리. 두 다리가 바지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 가죽 시트에 피부가 부딪치는 소리. 미칠 지경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 선명하게 그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치마 후크를 풀고 지퍼를 내리는 소리까지 들었을때는 자기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훔쳤다. 언제까지 눈을 감고 있어야 하는 걸까? 목욕하는 선녀를 기다리는 나무꾼이 된 마음으로 명원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