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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션록홈즈 Aug 21. 2023

뚫어 뚫어

두 겹을 찾아서


슈프림소프트, 프리미엄, 라벤더 바닐라, 천연펄프, 순수시그니처, 자이언트 울트라 펌프, 알로에...

사용 목적은 결국 똑같은데 앞에 붙는 수식어가 화려하다. 두루마리 휴지 말이다.


그만큼 중요한 부위(?)를 책임지는 생필품이기에 조금이라도 몸에 무해하도록 업그레이드되는 거겠지만.


가족의 형태에 따라 각 생필품의 구매 주기가 다른데, 우리 네 식구는 엉녕(엉덩이의 안녕)을 책임지는 두루마리 휴지를 약 2-3달에 한 번씩 사고 있다. 다만, 쿠팡에도 대형마트에도 내가 원하는 제품이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 결국 수소문 끝에 동네의 오래된 슈퍼에서(그것도 두루마리 상품칸 제일 구석진 곳) 우리 집에 꼭 맞는 휴지를 찾아냈다.


브랜드를 불문하고 내가 찾는 그것은 바로 ‘두 겹 두루마리’.

세 겹도 모자라 네 겹 화장지까지 나오는 시국에 두 겹을 찾기란? 생각보다 많은 발품이 필요하고 때때로 슈퍼마켓 사장님의 따가운 눈총을 받을 각오도 되어있어야 한다.(왜 굳이 세 겹 네 겹 휴지 밑에 깔려있는 아무도 찾지 않는 휴지를 빼내려는 것이냐!)


두 겹 짜리 두루마리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몇 번의 끔찍한 경험 때문인데, 심지어 그중 3-4번은 우리 가족도 아닌 손님의 것(?)으로 인한 봉변이었다.


그때의 상황은 아마 이러했으리라.

집에 놀러 왔다가 갑작스러운 장 운동으로 인해 화장실에 들른 손님 A. 그는 아마 그간의 습관대로 두루마리를 풍족하게 감아 뒷일을 해결했을 것이다.

그리곤 당황했을 것이다. 꿀꺽 넘어가야 할 변기가 시원한 소리를 내지 아니하고 싀싀싁- 변변찮은 소리를 냈을 테니. 불안한 마음으로 닫았던 변기의 뚜껑을 열고는 더 당황했을 손님 A.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티 안 나게 몇 번의 사투를 벌였을 그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질린 얼굴로 화장실을 나오고 마는데..


우리 부부는 손님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걱정 말라는 눈빛으로 모임을 마무리하고, 현관문 밖으로 손님을 내보내자마자 신랑은 지하실에서 뚫어뻥을 들고 터덜터덜 변기로 향한다.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내 아이의 것이다.‘

수십 번 주문을 외우고 뚜껑을 연 뒤 갈색물을 천장까지 튀겨가며 푸쉬푸쉬 뚫어 뚫어를 20-30번가량 하다 보면 꾸울꺼억- 시원한 소리와 함께 문제가 해결되고, 너덜너덜해진 신랑이 창백해져 화장실 밖으로 나오면 뒤처리를 위해 내가 들어간다. (위생을 위해 하이파이브는 생략한다.)


소독약을 여기저기 뿌리며 벽과 바닥, 천장을 닦고 나서 마지막으로 변기에 향이 진한 푸드롭(poo drops)을 드롭이 아니라 거의 쏟아붓고 나면 사건 종료.


공중화장실 또는 카페 화장실에 붙어있는 ‘휴지는 꼭 쓰레기통에’ 문구를 우리 집에도 붙여야 하는 것인가. 우리 부부는 잠시 고민을 하지만 결국은 까먹고 그냥 가끔씩 세차게 뚫어가며 이렇게 사는 중이다. 단, 손님을 초대하는 빈도가 현저히 줄었을 뿐...



아파트에 살 적엔 변기가 막힌 적도 거의 없었거니와 세 겹 미만의 두루마리를 써본 적도 물론 없었다. 나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손에 붕대를 감듯 휴지를 둘둘 말아 뒤처리를 했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허나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노후된 주택은 세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변기, 수압, 정화조.

조금만 무리해도 꿀꺽 삼키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해대는 변기와 폭포처럼 시원하게 쓸고 내려갈 수 없는 수압. 그리고 낡은 정화조.

이러고 싶진 않지만 매일 변기에 앉을 때마다 집 밑에 자리 잡은 정화조가 조금씩 차오르는 것을 상상하며 가능한 얇고 적은 양의 휴지를 사용한다. 6개월에 한 번씩 정화조를 청소하는 날마다 “아오- 아오-” 감탄(?) 하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죄송하고 덜 민망해지고 싶어서.


오늘도 나는 슈퍼에서 두 겹 두루마리를 사다가 냉장고 옆 자투리 공간에 휴지를 저장했다. 슈퍼마켓에서는 가장 밑에 위치했던 두 겹 휴지가 우리 집에서만큼은 세 겹 네 겹 휴지를 제치고 가장 위에 자리 잡는다. 그간 집들이 겸 손님을 초대할 때마다 선물로 받았던 슈프림소프트, 프리미엄, 라벤더 바닐라, 천연펄프, 순수시그니처, 자이언트 울트라 펌프, 알로에 화장지들은 이 집에서는 찬밥 신세다.


그 어떤 화려한 수식어로 나를 현혹시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리. 두 겹은 사랑이요 진리요 생명이도다. 두 겹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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