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 라이프에 드루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도 아니고 주택 사는 예쁜 언니라니... 뭔가 갸우뚱하긴 하지만 내가 주택에 확 꽂히도록 큰 계기를 선물해 준 소중한 사람이 있다.
때는 2021년 봄.
한창 코로나로 아파트가 답답하게 느껴져, 틈만 나면 아이들과 손 잡고 서촌의 골목골목을 산책 다니던 때였다. 산책하다가 골목에서 몇 번 마주친 적 있던 사이, 그러니까 그렇게 가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친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는 관계인 ‘아이 친구의 엄마’가 어느 날 집에 한번 놀러 오라고 초대를 했다.
실외에서도 실내에서도 늘 마스크를 두르고 사람간의 적정한 거리를 지키던 한창 예민하던 시기에 서촌의 주택에 초대를 받다니! 이건 마치 높디높은 돌담이 와르르 무너지듯 말랑하고 설레는 일이었다.
아이와 나는 한옥이 즐비한 골목을 지나고 돌계단을 올라 초대받은 집에 도착했다. 막 6살이 된 두 꼬마들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만나자마자 집의 곳곳에 숨으며 숨바꼭질을 해댔다. 평면적으로 넓게 펼쳐진 아파트에만 살다가 위로 아래로 연결되는 집을 보니 아늑하면서도 신선했다. 화장실에서 좋은 향이 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우리가 온다고 열심히 청소를 한 게 분명했다.
약간의 어색한 기류 속에서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숨바꼭질을 하던 아이들이 갑자기 계단을 오르며 옥상에 가겠다고 했다. ‘옥상? 옥상은 위험한 곳 아닌가?‘ 여섯 살 아이들만 보내기 불안해, 그들의 뒤를 따라 나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고 철문을 열고 발을 디딘 순간 그곳은 (이런 표현 진부하지만) 천국이었다.
시원한 봄바람이 온몸을 사르륵 휘감던 그 순간의 감촉. 옥상 난간으로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골목 전경. 크레파스를 들고 옥상의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아이들. 모든 것이 눈부시도록 예뻤다. 날개만 없을 뿐, 천사 두 명이 천국에 앉아 해맑게 놀고 있는 듯했다. (그래요, 딸바보입니다.)
천사들의 뒷모습에 심취한 건지 옥상에 머무는 동안 나도 모르게 몰캉몰캉 다정해져 버려, 아이 친구의 엄마에게 “언니-” 하고 부르게 되었다. 그날부터 우리가 허물없는 언니동생이 된 건 자연스러운 일.
언니의 집에 푹 빠져버린 나는 언니의 집을 내 멋대로 우리의 아지트로 삼고 자주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옥상의 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언니가 내려준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옥상 있는 집에 살고 싶다고. 옥상이 있는 집을 가지고 싶다고.
(물론 그때는 옥상 라이프의 고충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가 내리면 후다닥 옥상에 펼쳐놨던 테이블과 의자를 접고, 송진가루가 날리면 하나하나 정성스레 닦고, 바람이 심하면 차양막을 걷고 눈이 내리면 얼지 않게 쓸고... 기타 등등등등등등등)
언니와 나는 자주 동네를 산책했는데, 목적은 운동이 아닌 주택 찾기였다. 잘 지어진 예쁜 주택을 보면 손뼉을 치며 환호했고, 관리가 안된 주택을 보면 감놔라배놔라 우리끼리 훈수를 두며 개선점을 토론했다. 언니와의 ‘주택 아이 쇼핑’이 누적될수록 나는 점점 주택 라이프를 동경하다 못해 갈망하게 되었고, 그러다 결국은 주택으로의 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아파트 생활에 최적화되어 있던 내가 이런 마음을 먹기까지는 사실 주택의 매력보다는 언니라는 사람의 매력이 더 컸으리라. 언니의 집에 대한 애정, 호기심 어린 맑은 눈빛(맑눈광 아님),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대화법, 아이를 대하는 태도, 경계심이나 편견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등 다방면으로 배울 점이 많은 멋진 언니가(심지어 밥도 잘 사줌) 자꾸만 드루와- 드루와- 옥상 라이프에 드루와- 하니 안 넘어갈 수가 없지.
주택으로 이사를 온 후로는 주택 사는 예쁜 언니에 이어, 한옥 사는 예쁜 언니, 청와대 근처에 사는 예쁜 언니 등 주변에 예쁜 언니들이 늘고 있다. 물론 원초적인 관계는 모두 ‘아이 친구의 엄마‘지만. 예쁜 애들끼리(나 포함) 모여 주택 아이쇼핑도 하고, 동네에 핫플이 생기면 서로 공유했다가 어쩌다 한 번씩 출동하기도 하고, 커다란 수박 한 통을 사다가 쪼개어 나눠 먹기도 한다.
이제는 서로의 집에 갈 때마다 광나게 청소를 하고 화장실에서 좋은 향이 나도록 신경 쓰는 대신, “우리 집 지금 엄청 드러운데-” 하는 경고로 퉁 치는 사이가 된 우리.
서촌의 주택에 살며 얻은 것 중 소중한 몇 가지를 꼽으라면 단연코 같은 동네, 옆 골목, 길 건너에 사는 예쁜 언니들이 상위권을 차지한다. 이번 가을에는 예쁜 언니들과 다 같이 우리 집 옥상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 한잔 기울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