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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크리스마스

by 션록홈즈


재작년 12월. 동네 꽃집에서 작은 화분을 샀다. 우리 집만 트리가 없다며 속상해하는 아이들의 말을 못 들은 척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커다랗고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는 아니지만, 화분에 작은 전구를 걸쳐놓으니 제법 트리처럼 보였다. 그리고 다행히 산타 할아버지께서도 헤매지 않으시고 트리처럼 보이는 트리 밑에 선물을 두고 가셨고.


2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몇 가지 변화가 생겼는데, 내년이면 중학생이 되는 첫째 아이가 드디어! 산타를 믿지 않게 된 것. 그리고 아직 산타의 선물을 기대하는 둘째 아이는 트리 없는 12월에 적응하게 된 것이다. (사진 속 화분은 죽고 말았...)

크리스마스 때마다 트리를 살지 말지 고민하던 나는

이제 트리에 대한 소비에서만큼은 자유를 얻은 기분이다. ‘그까이꺼 뭐 얼마나 한다고 하나 사주지!’ 스스로에게 매년 던져왔던 작은 질책에도 불구하고 사지 않은 이유는 플라스틱 트리는 쓸모를 잃어도 썩어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랑 같이 다니면 안 쓰던 돈도 쓰게 된다는 주변인들의 증언처럼, 한때 나는 ‘예쁨’을 위한 소비를 즐겨하고, 동시에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소비요정이었다. 특히나 지금 살고 있는 주택으로 이사를 오면서, 어찌나 사고 또 사고, 사고 또 사고, 또 사고 또 사고... 사고에 문제가 생겼나 싶을 만큼. 뇌에 사고가 났나 싶을 만큼 소비를 많이 했었다.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이사 오고 난 후 딱 일 년이 지난 시점부터였다. (땡스 투 잔고)


그렇게 정신없이 산 것들로 집을 예쁘게 채웠으나, 그 사이 깨질 것은 깨지고 부서질 것은 부서져버려 사실상 이제는 남아있는 것도 별로 없다. 예를 들자면 값비싼 그릇, 유리 화병, 빈티지 소반, 가구, 침구, 패브릭 등등... 결국 깨지고 부서지고 낡으면 아무짝에 소용이 없어지니, 잠깐의 만족을 위해 쉽게 저지른 소비는 대체적으로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무한 소비의 공통점은 주로 예뻐 ‘보이기’ 위해 산 것이더라.


비교 대상은 안되지만, 오히려 주택살이를 하며 빛을 발하는 것은 몇천 원 주고 동네 철물점에서 산 빗자루와 쓰레받기, 눈 치우는 삽, 빨랫줄, 파리채 등등 늘 손에 가까이 닿는 물건들이다. 도서관에서 1차 빌려보고 나서 꼭 소장하고 싶어 산 책도 읽을 때마다 뿌듯하다. 세월이 지날수록, 손때가 묻을수록 만족스러운 소비다.


주택 생활 3년 만에 이상주의자에서 현실주의, 실용주의자가 된 것 같아 어떤 면에서는 안타깝기도 하지만 자연스러운 변화다. 몇 주 전 첫눈이 오던 날, “우와! 눈이다!” 3분 정도 감상한 뒤 신랑과 골목으로 나가 눈을 쓸며 땀을 흘렸던 것처럼 말이다.


눈을 쓸다 말고 우리 집을 쓱 한번 둘러보니 세상에, 집 앞에 이렇게 멋진 트리가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3년 만에 빨간 벽돌 담장을 훌쩍 넘을 만큼 자란 블루애로우. 쓸모를 잃었던 트리 전구를 다시 꺼내 칭칭 감아주고, 아이가 만든 오너먼트를 달아주니 이보다 멋진 트리가 또 있을까 싶다. (물론 둘째 아이는 산타 할아버지가 집 밖에다 선물을 두고 가서 누가 훔쳐가면 어쩌냐고 소리를 버럭)



세상의 모든 것을 유해한 것과 무해한 것으로 나눌 수는 없다. 나에게는 유해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무해할 수 있고, 또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어떤 집에서는 매년 겨울마다 가족에게 행복감을 줄테고, 그렇다면 그것은 결코 쓸모없는 소비가 아닐 테니까.


작은 바람이 있다면 ‘해’가 되지 않는 하루하루를 살고 싶다. 자연에도 해가 되지 않는, 사람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내 마음에도 해가 되지 않는 무해한 삶. 그러려면 산속으로 들어가 혼자 살아야 하나. 인왕산에 좋은 터가 있나. 부동산에 가야 하나. 산속 오두막집은 어떻게 꾸밀까. 나무 바닥에는 페르시안 카펫이 어울리겠군. 벽난로도 있으면 좋겠...

다시 소비 요정이 꿈틀댄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무해한 삶을 위해서는 지금의 집에서 쭉 살아야겠다. 꾸미지 않아도, 보여줄 게 없어도 편안한 집. 그게 나에게는 무해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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