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엄마 간병기/ 아빠의 곤달걀이 돼보지 못한 딸의 일기.
나의 할아버지는 그러셨다.
"나야 뭐. 우리 마나님 모시기를 곤달걀 모시듯 하지"
당신께서 아내를 대하는 모습이 항상 곤달걀 모시는 행태라고.
곤달걀은 곯아 버린 달걀. 즉, 다 삭은 터지기 직전의 달걀이라고 한다.
곤달걀은 껍질도 물렁물렁하거니와, 터지면 지독한 냄새가 나서 정말 조심스레 다뤄야 한다고 한다.
약하디 약한 달걀 보다도 더 쉽게 깨진다고.
우리 엄마를 대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 '곤달걀 모시듯 하다'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골수이식을 받고 한 달을 내리 무균실에 있었던 아빠와 함께 한 달을 내리 무균실에서 보낸 사람이 바로 엄마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끈끈한 정과 전우애로 다져진 사이다.
IMF와 그때가 아니라도 닥쳐온 수많은 경제 위기에서 엄마 아빠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
(싸운 것은 시댁 식구들 때문이었을 뿐)
엄마는 바통을 이어받듯, 아빠의 치료가 끝나고 안정기가 되자 파킨슨 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마땅한 약도 없이 점점 퇴화되는 것을 보고 아빠는 당신이 아플 때 보다 더 약해졌다.
보행기나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걸을 수 없는- 아니 걸을 수 있었지만 위험하다고 혼자 걷는 것을 못하게 했으므로- 엄마의 걸음을 조금이라도 빨리하면 아빠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어어어 어! 를 외쳤다.
엄마의 병을 늦출 수 있는 것은 본인의 노력밖에 없었는데도 아빠는 엄마가 다칠까 봐 엄마의 운동을 막았다. 그 대신이라며 하루에 30분 이상을 지금까지도 본인이 마사지를 한다.
솔직히 말해서 엄마가 혼자 설 수 없고,
이제는 워커를 끌고도 잘 걷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아빠를 원망한다.
충분히 걸을 수 있었을 때도
엄마가 조금이라도 숨 차하면 그만하자고 하고 낮잠을 자게 한 아빠를 원망한다.
내 정신과 의사는 아빠가 엄마를 너무 아껴서 그런 거라고 했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서 더 안쓰러운 거라고. 모질게 대할 수가 없다고.
하지만 나는 아빠가 누군가를 보호하는, 따듯한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 화가 난다.
나에게 아빠는, 그런 보호자는 아니었다.
이렇게 무르게 행동하는 아빠를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빠의 생각은 어느 정도 맞았다.
얼마 전 엄마가 넘어졌다.
혼자 화장실에 가다가 넘어졌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허리가 아픈 것이 오래갔다.
내일은 병원에 가자, 내일은 가자, 하고 일주일을 내리 앓다가 병원에 갔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엄마는 척추 뼈에 금이 간 상태였다.
그런데 그게 처음이 아니라고 했다.
놀랐지만 괜찮았다. 나는 강했다. 충분히 많은 고비들이 있었고 이 정도는 괜찮았다.
나의 생각은 간단하다.
죽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럼 괜찮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달랐다.
엑스레이실에서는 그 예민함이 극에 달해 엑스레이 기사들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고,
엄마에게 손대지 말라고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하다가 결국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도 멀리서부터 택시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빗속으로 뛰어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몇 번이나 붙잡아야 했다.
호들갑스럽게 구는 아빠를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내가 아빠를 고운 눈으로, 혹은 애처로운 눈으로 볼 수 없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빠는 하나에 꽂히면 나의 모든 행동을 그렇게 몰고 가는 편이었는데
호들갑스럽다는 평가를 한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웃음 소리가 너무 크다던지, 너무 신나 한다든지 한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나이 때 아이가 가지는 천진함. 그 정도였다.
하지만 아빠의 눈에는 굉장히 큰 인간적 결점이었나 보다.
가족 모임으로 숯불 고깃집에 간 어느 날이었다. 숯불의 불똥이 내게 튀어 부지불식간에 앗! 하고 외치는 것을 아빠가 봤다.
아빠는 나의 고통보다는 바르지 못한 사람으로 자랄까 봐 더 걱정인 사람이었으므로. 멀리서 호들갑 떨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당시 시집 온 지 얼마 안 된 나의 외숙모가 깜짝 놀라서 '불똥이 튀었어요'라고 편을 들어줬다.
그래도 아빠는 완강했다. 내 기억에 아빠는 괜찮은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호들갑스러운 애고, 그것을 고쳐야 했으므로.
아빠는 내가 신나는 꼴을 보기 싫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촌 동생들과 조금이라도 재밌게 놀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야단을 쳤다. 경박스럽다던지, 아이들을 데리고 노는 것이 너무 민주적이지 못하다던지, 아이들 교육에 좋지 않다던지, 너무 시끄럽다던지. 아이들과 기껏해야 네 살 차이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이 어린이가 당연히 할 것들을 '거세'당했다.
그런 아빠가 호들갑스러워지는 모습을 나는 두고 보기가 힘들다.
그런 아빠가 엄마를 싸고도는 것이 나는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난다.
아빠가 가족 모임에서 신나게 얘기를 할 때면 모두 앞에서 망신을 주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참는다.
제발. 가만히 좀 있으세요.
물론 그 말을 나는 굉장히 돌려서 했다. 내가 돌릴 수 있는 최대한으로.
아빠. 차가 도착하면 전화를 주시는데 아직 전화가 안 왔잖아.
주차를 하고 전화를 하지 않을까?
어차피 저 뒤로 들어가는 거라서, 지금 가봤자 차를 못 탈 것 같아.
천둥 번개가 치는 빗속으로 엄마의 휠체어를 밀고 가려는 아빠를 말리기 위해 내가 한 말들이었다.
아빠는 집에 와서 나를 호출했다.
그리고 또 트집을 잡아서 나를 혼냈다.
하루 종일 고생한 내게 왜 그러냐고 엄마가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아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 그거 정말 잘못하는 거야"
내일은 같은 이유로 얼마나 나아졌는지, 혹은 악화됐는지 중간점검을 하러 가는 날이다.
나는 벌써부터 숨이 막힌다. 그래서 정신과를 오늘 다녀왔다.
선생님. 제가 너무 힘들어요. 평정을 찾기가 힘들어요.
의사 선생님은 다 받아줘야 한다고 했다.
아빠가 기댈 곳이 없고, 풀 곳이 없으니까 내가 받아줘야 한다고.
선생님. 저는 계속 그렇게 살아왔어요.
아빠가 너무 불쌍해서 제가 다 받아줬어요.
그리고 결국 오늘의 제가 남았어요.
그런데도 더 해야 하나요?
우는 아이에게 울지마! 라고 하면 안되듯
잔소리를 하는 아빠에게는 그만해! 라고 하면 안되는거라고 했다.
정신과 의사도 내게 아빠의 부모가 되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건 숙명이다.
아빠의 부모가 되어주는 것은
나의 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