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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송어 Dec 20. 2021

미스, 전업 주부.

그리고 간병인

애인과 헤어졌다. 


전통적인 가치관을 고수하던 애인에게 나는 구미에 맞는 상대가 아니었다. 

나는 내 일을 우선시하는 사람이었고,

그는 자신을 우선시하는 사람을 필요로 했다.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힘들었다. 

그의 기대에 맞춰 전업주부가 된 나를 몇 번이나 상상해봤다. 

그의 울타리에서 안온하게 

그의 밥을 짓고 기다리는 나의 모습을. 


그리고 그건 나를 위한 답안은 아니었다. 


애인과의 동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도망치듯 떠난 집이었다. 

나는, 

언제든 내가 원할 때는 전세대출을 구해서라도 나가면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내 일이 있으니까. 


*

 

나의 일, 자체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젊은(내 업계에서는 어린 축에 속한다) 여자를 사람들은 무시했고 나는 필요 이상의 시간을 이웃과 싸우는 데 사용해야 했다. 


"아빠가 나가서 정리해줄게" 


나는 너무도 지쳐있었다. 

새로운 사업이 여러 개였고, 평생을 생각했던 애인과 헤어졌고, 

모든 사람들이 나의 것을 넘보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일주일이면 될 거야" 

그동안 간병이 필요한 엄마와 집안일들을 하고 있으면 된다고 했다.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아빠 뒤로 숨는 것 같아서 너무 창피하긴 한데, 그래도 지금은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려고]


다 커서 아빠 뒤에 숨어서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게 우스웠다. 

하지만 정말로 

정말로 별 수 없었다. 


아빠는 원래 워커홀릭이었다. 

아빠는 매일 즐거워했다. 

그리고 집안일에 손 하나 대지 않았다. 

기억났다. 

아빠였다. 

내가 어렸을 때 알고 있던, 그 아빠. 


*


그리고 어느 날 아빠가 문자를 보냈다. 


[앞으로 아빠가 나갈게. 

너는 이제 네가 하고 싶은 일 알아봐]


나는, 갑자기 직장을 잃었다. 






집 잃은 비버처럼, 갑자기 일을 잃은 나. 




뿐만 아니었다. 

애초 엄마의 간병을 포함한 온갖 집안일들이 내게 할당되었다. 

아니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당연히 내 것인 양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왜 주어진 일을 하지 않냐고 했다. 

그렇게 아빠의 폭주타임이 돌아왔다. 

늘 그렇듯 아빠는 나의 인격을 한동안 모독하고서는 


"아빠를 왜 도와주지 않냐"라고 했다. 


너는 일하고 피곤하다고 집에 와서 바로 잤으면서 아빠는 바로 없게 하냐고. 

나는 정말 많은 이웃들에게 시달려서 집에 오자마자 바로 잠에 들었지만,

아빠는 취미생활을 즐기고 온 후 차려 놓은 밥상을 받으며 

나한테 잘도, 잘도 그렇게 말을 했다. 


왜 아빠를 도와주지 않냐고 

아빠를 왜 지켜주지 않냐고. 


"나는 아빠가 날 도와주려고 한 줄 알았어."


아빠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나를 여기 남겨 두고 도망치기 위해 했던 얄팍한 거짓말이었어?


나는 약속에서 돌아와 만취한 상태로도 방치되어있는 엄마를 챙겼다. 

그렇게 엄마를 방치해두고서는. 

왜 아빠를 지켜주지 않냐고 성질을 냈다. 


뭘, 더 해줘야 하는 것일까. 

아빠는 내게 묻는다. 

내가 네 아들이냐 친구냐. 

정말 묻고 싶다. 


당신이 내 아들입니까? 




내가 마지막까지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사업 중에 하나는 

아빠가 나의 동의 없이 벌려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스럽게 나에게 넘어왔다. 


엄마도 그렇다. 

엄마를 요양병원에 모시는 얘기는 진작부터 있어왔다. 

요양병원을 반대한 것은 아빠였다. 

그리고 자기가 버티지 못하니까 

나를 앉혀 놓고 도망친 것이다. 


아빠는 참, 살기 편하겠다. 


*


나는 엄마의 기저귀를 갈며 상념에 빠진다. 


차라리 내가, 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면. 

밥이나 하고 살림이나 했겠지. 

언젠가는 예쁜 아기를 낳았겠지. 

독박 육아를 했겠지만 

지금도 독박 간병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기혼이나, 아이 엄마라고 남는 타이틀도 없이 

무력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는 기분이다. 


그나마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입으로 들어갈 밥을 지었겠지. 

지금 같은 마음으로 가족의 입에 들어가는 밥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전업주부가 됐다. 


페미니스트로서 절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내 삶 같은 사람을 베어낼 정도로 하기 싫어했던

바로 그 일. 


나는 미혼의, 전업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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